淸州 新鳳洞 古墳群은 淸州市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대규모의 백제 고분군이다. 토광묘는 대체로 4~5세기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82년도의 1차 조사와 92년도의 3차 조사시 확인된 횡혈식 석실분의 존재이다. 이들은 비록 3기에 불과한 것이어서 조사된 유적의 수에 비하면 크게 주목할 바는 못되지만 구조적인 특성과 淸州地域이라고 하는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해 1차 조사시에 1기의 석실분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비상한 관심을 불러 모았었다. 백제의 성장 과정이라든가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 그리고 청주지역과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서울지역과의 관계, 그리고 이것을 확대시켜 보았을 때 당시 백제사회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 등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많았기 때문에 자뭇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 횡혈식 석실분이 이미 한성시대 후반부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면 이 신봉동 1호분에 대해서도 자연스러운 설명이 가능하지만 최근들어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한성시대에는 횡혈식 석실분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신봉동 1호분에서 갑자기 등장한 횡혈식 석실분의 존재를 설명하기가 난감해 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은 발굴조사단에게도 있었던 듯 신봉동의 횡혈식 석실분과 거기에서 출토된 유물이 편년상 일치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평면 형태, 棺臺시설, 羨道 등을 통해서 볼 때 적어도 6세기 후반 이후의 것임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이 82년도 1호분도 92년도 조사분과 마찬가지로 백제고분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럼 이 신봉동 82-1호 석실분의 소속이 문제인데, 시기적으로나 석실의 구조면에서 볼 때 고구려의 석실분은 아니고, 구조를 중심으로 계통을 추적해 보면 92년도 조사된 2기의 석실분과 마찬가지로 역시 신라계통, 더 정확하게는 낙동강 서안에 있는 가야의 횡혈식 묘제와 이어진다고 생각된다. 길이보다 너비가 큰 석실분은 백제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반면에 영남지역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석실분은 고구려고분일 가능성이 順興 邑內里 石室墳에서부터 시작되어 경주를 거쳐 낙동강 서안으로 퍼졌던 것이다. 이것이 이 지역에 나타난 것은 가야 멸망 후의 徙民政策에 따른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