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가 성장해 나가던 3~5세기에 걸쳐 全南地域에서 사용되었던 甕棺封土墳은 당시 서울․公州 등 百濟 중심지역의 대표적 묘제인 積石塚이나 石室封土墳과는 전혀 다른 묘제이면서 규모에 있어서나 출토유물에 있어 百濟에 못지않은 면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당시 全南地域에는 百濟와는 별개의 독자적인 정치체가 존재하였고, 그 구체적인 실체는 馬韓과 관련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5세기 후반부터 기존의 묘제와는 전혀 다른 石室封土墳이 사용되면서 점차 甕棺封土墳은 소멸해 갔는데 새로 들어온 石室封土墳은 百濟의 고분일 것이므로 石室封土墳의 시작과 함께 全南地域의 土着社會가 본격적으로 百濟의 支配아래 들어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全南地方의 土着社會가 百濟로 編入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歷史的 事實이었다고 하겠지만 그에 관한 文獻資料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 時期와 過程에 대해서는 論難이 끊이지 않고 있는 형편인데 이 問題의 核心은 全南地域 石室封土墳과 百濟 石室封土墳과의 關係속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全南地域 石室封土墳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정리하여 보고 필자의 견해를 밝혀 보았거니와 그 가운데 기존의 견해와 가장 큰 차이점은 全南地方 石室封土墳들이 모두 百濟系統인 것이 아니고 百濟의 영향 아래 축조된 것은 6세기 중엽경부터일 뿐 그 이전에 해당하는 榮山江式 石室封土墳들은 百濟와는 無關하다는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