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유적의 검토
III. 고분의 구조적 특성
IV. 고분군의 편년 및 의미
V. 맺음말
요약
여미리고분군은 4세기대의 토광묘에서 백제말기의 석실분까지 諸墓制가 자리하고 있으며, 한반도 남쪽지역에서 처음으로 와관묘가 확인되어 백제 묘제연구에 새로운 자료로 추가되었다. 확인된 諸 墓制의 구조적 특성을 살펴보면, 토광묘는 구조적으로 일반적인 토광묘와 별다른 차이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일부 토광묘의 경우 지상식에 가깝게 조영되어 있어 특징적이다. 부장된 유물을 살펴보면, 6호와 8호 토광묘에서 석실분에 부장되는 高杯와 甁形土器가 출토되어 일반적인 부장양상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횡혈식 석실분은 장축방향이 등고선과 평행한 점, 묘실의 위치가 지상에 가까운 점, 관정이 출토되지 않는 점 등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토광묘와의 관련성을 상정할 수 있는데, 이는 재지인들이 축조재료로 석재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도읍지역과 다른 구조가 발생된 것으로 판단되다. 횡구식 석실분 역시 토광묘의 전통이 유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瓦棺墓는 북한지역에서 2世紀代에 조성된 예를 제외하고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묘제형식이다. 瓦棺墓의 성격은 유아용이나 성인의 二次葬으로 추정할 수 있다. 편년을 바탕으로 여미리 고분군의 의미로써 석실분이 백제고분의 변천사에 있어 어떠한 위치에 해당하는가이다. 우선 확인된 고분 중 횡혈식 석실분인 8호분과 횡구식 석실분 Ⅰ類型은 구조를 통해 토광묘에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출토유물을 통해 기존에 조사된 고분보다 시간적으로 후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고분 구조는 백제가 한성에서 금강유역으로 천도한 후, 서산 여미리지역을 대중국 교통로로 이용함으로써 다른 지역과 달리 급격하게 고분의 형식이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미리 고분군의 경우 동시기에 조영된 중앙의 고분구조와 비교할 수 있는 지방양식의 고분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즉 6세기 중반이후 백제가 지방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지방의 묘제가 중앙의 묘제인 횡혈식 석실분으로 통일되고 있다. 그러나 여미리 고분군의 경우 6세기 중반까지는 등고선과 평행한 점, 묘광을 얕게 굴착하는 등 구조적인면에서 중앙양식과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요컨대 백제의 중앙 묘제인 횡혈식 석실분의 지방으로의 유입은 지역에 따라 일시적이 아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입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