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序言
II. 百濟墓制와 王陵
III. 百濟 橫穴式石室墳과 雙陵
IV. 雙陵이 百濟王陵일 可能性
V. 結言
요약
익산의 쌍릉도 전언을 근거하면 백제왕릉 즉 무왕릉으로 인식될 수 있는 분묘이다. 그러나 이는 전언에 근거한 것일 뿐, 관련자료의 부족으로 역사 혹은 고고학적으로 구체적 검증이 이루어진 바가 없었다. 이에 본고는 백제고분의 종합적 검토속에서 이 쌍릉이 백제왕릉으로의 비정이 가능한가를 타진하여 보았다.
백제사회도 고대사회로서 王者를 정점으로 편제된 계층사회이다. 따라서 사회전반은 계층적 질서가 유지됨은 물론이고, 전통성이 강한 묘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을 것이다. 특히 왕실은 그들의 권위를 한껏 고양하기 위하여 상징적 기념물로 능묘를 조영하였는데, 당대에 조성된 능묘가 각 도읍지별로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런데 백제고분은 묘제적 측면에서 보면 다양성이 매우 두드러진다. 물론 이러한 다양성은 조영주체인 백제사회의 복합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나 이처럼 다양한 묘제는 백제사회의 일원적 통일과정과 짝하여 하나로 통일된다는 특징이 있다. 초기의 다원적 묘제가 횡혈식 석실분이란 하나의 묘제로 통일되는데 이러한 묘제의 통일은 백제의 정치적 발전과 병행하여 이루어진다. 그것은 도읍지를 중심으로 조영된 중앙묘제와 지방사회에서 조영하는 토착묘제로 구분할 경우 중앙묘제를 중심으로 통일되는 것이기에 정치적 환경과 묘제의 환경과도 일치한다.
익산의 쌍릉은 묘제적으로 횡혈식 석실분에 속한다. 그것도 고임식으로 백제말기에 전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한 묘제이다. 이러한 환경은 묘제자체만으로 성격판단을 어렵게 하는 것이기는 하나, 동시기의 왕릉으로 인정되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대비할 경우 품격에서 보다 상급의 내용을 보인다. 나아가 공주지역의 왕릉인 송산리 고분군 등의 조성환경으로 보면 백제사회에서 왕릉은 도읍지별로 하나만 조영되었다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는 논거가 마련되고 이에 따라 백제의 왕릉은 다수가 다수의 지역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결론에 따라 익산 쌍릉이 백제왕릉, 즉 무왕릉일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아진다. 물론 이러한 결론은 추정적 논지의 전개에 따른 것일 뿐으로 이의 보완을 위해서는 쌍릉의 심층적 조사외에 주변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정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필자 결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