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지역의 백제시대 고분은 錦江河口와 彌勒山 一圓을 중심으로 각각 다른 유형의 고분이 집중 분포되어 지역적인 특성을 보인다. 금강하구에는 竪穴式石槨墳, 橫口式石室墳이 분포되어 있는데 수혈식석곽분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土着勢力의 분묘이고 나름의 位階를 가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횡혈식석실분의 등장은 백제 중앙세력의 확산을 의미하는데 횡구식 석곽분의 등장과 초기유형의 횡혈식석실분의 축조가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되고 있다. 입점리 1호분은 중앙묘제의 형식으로서 그 출토유물에서 익산지역의 당시 위상 및 백제지방통치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었다. 미륵산 일원에는 사비유형이 주를 이루지만 이 유형에서 축약 퇴화된 횡구식석곽분도 분포하고 있다. 사비유형은 백제 중앙묘제와 동일 구조로서 대표적으로 무왕릉과 그 왕비릉, 성남리고분군 등인데 백제말기의 다른 유적과 더불어 백제사상 익산의 위치를 조명할 수 있는 자료로 생각된다. 특히 쌍릉은 그 구조와 출토유물에서 부여 능산리의 왕릉들과 비교되는 분묘로서 규모는 오히려 대형으로 왕릉임에 틀림없음을 살필 수 있었다. 그 연대는 7세기 전반경에 해당하며 당시의 백제 정치상황을 고려하고 무왕과 익산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쌍릉의 피장자는 무왕과 그의 왕비릉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雙陵이라는 記述的 명칭에서 실제 주인공인 武王과 武王妃陵으로 호칭할 것으로 제안하였다. 마지막으로 향후 무왕릉에 대한 조사 및 정비 방향에 대해서는 우선 토지 매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부여 능산리에서 보듯이 고분군 주변에 조영되었던 先王의 명복을 비는 願刹에서 百濟金銅大香爐가 발견된 바 있듯이 주변이 모두 유적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강력한 왕권을 지향했던 무왕이기에 단지 무덤만을 조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곧 무왕릉을 중심으로 陵域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이에 따른 부속유구가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익산지역에서 어느 유적보다 무왕릉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단편적이고 전시적인 정비보다 그 계획 단계에서부터 전문가가 적극 참여해야함은 물론 종합적인 조사가 선행된 이후 정비방안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