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영산강유역 고대문화의 시·공간적 범위
III. 3~4세기의 문화상
1. 주구토광묘의 성격
2. 옹관고분의 발생과정
3. 주거지와 유물의 변화 양상
IV. 3~4세기대의 사회의 실체와 성격
V. 맺음말
요약
三國의 成立은 문헌상으로 紀元前後에 이루어졌으나 고고학자료에 나타나는 삼국은 이보다 늦다고 볼 수 있다. 고고학에서 삼국의 성립을 종래 高塚古墳의 발생과 연결짓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점차 그 이전으로 올려보고 있다.
삼국의 발전기에 해당하는 기원후 3~4세기 영산강유역에서는 주구토광묘에서 옹관고분으로 넘어가는 변화가 이루어졌다. 1~3세기에는 주구토광묘가 이 지역에 자리잡은 대표적인 무덤이다. 3세기 후반 영산강유역에서는 독자적인 대형 옹관이 만들어졌고, 뒤이어 이것이 주 모제로 채택되면서 옹관고분으로 발전해 갔다. 일부 토광묘만으로 이루어진 고분도 있었으나 토광과 옹관이 같은 봉분에 매장한 고분이 주로 만들어지다가 옹관만을 매장한 고총고분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이 지역은 백제가 직접적으로 통치하지 못하였다. 이 지역에는 소국들이 존재하였으나 아직 통합된 정치체의 존재를 인정할 만한 증거는 없다. 당시 사회를 일반적으로 馬韓이라고 보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倭로 보거나 ‘옹관고분사회’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영산강유역에 倭가 자리잡았다는 견해는 타당성이 없는 주장이다. 더구나 일본학자조차 언급하지 않고 있는 반남고분의 사회(즉 옹관고분사회)를 倭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 문화가 변화된 것은 단순히 주민들의 이동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삼궁의 발전기라는 외부적인 영향이 컸을 것이고, 내부적인 요인으로는 철기문화의 시작과 농경의 발달을 기반으로 인구 증가로 인한 계층화와 대외적인 교류의 증대를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어떠한 요인이 더 중요한 것인가는 앞으로 연구되어야할 문제이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