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가루베의 백제고분 조사와 연구
3. 공주 송산리 6호분의 조사
4. 송산리 6호분을 둘러싼 문제
5. 가루베의 소장 유물들
6. 맺는말-가루베, 그 평가의 명과 암-
요약
1927년부터 1945년까지 약 20년간, 백제의 도읍이었던 공주 및 그 인근지역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백제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했던 가루베지온(輕部慈恩, 1897~1970)은 백제문화사 및 백제고고학의 초기 연구자로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백제미술』, 『백제유적의 연구』 등 전문 저서를 발간한 바 있고, 그의 학문적 견해는 이후 관련 분야 연구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적의 조사과정에서 행한 비학문적 조사 방법, 그리고 개인적으로 취득한 많은 유물의 증발로 인하여 이후 전문가와 지역민, 양쪽으로부터 극단적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이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실제 가루베지온의 연구와 조사 혹은 유물 문제는 지금까지 거의 객관적 사실 검토가 이루어진 바가 없다. 본 연구는 가루베의 조사활동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백제고분의 조사, 특히 백제의 왕릉급 무덤인 공주 송산리 6호분에 대한 조사의 경위를 상세히 검토하고, 아울러 유물의 행방 문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확인 사실을 정리하였다.
가루베지온은 공주의 백제고분 738기를 6개 유형으로 분류하여 보고하였고, 그중 100여 기를 세부 조사하였는데 이에 대한 중점 조사는 주로 1931년과 1932년에 이루어졌다. 송산리 6호분에 대한 조사는 1933년 여름(7월 말~8월 초)에 이루어졌는데, 6호분에 대한 개인적 조사 직후, 이에 대한 공식조사를 위하여 총독부로부터 전문조사단이 현지에 파견됨으로써, 문화재에 대한 私的 발굴 문제가 사건화 되기에 이르렀다. 그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유물 중 약간은 해방직후 귀국 시 휴대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 대부분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던 유물을 매도하였으리라는 세간의 추정은 아직까지 확인된 사실이 없다.
가루베의 백제문화 조사활동에 대한 파악은 백제사, 백제고고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다른 한편 이것이 식민지시대의 특수한 여건에서 가능했던 한국문화 연구의 한 사례였다는 점에서 식민지시대의 문화적 실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일정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