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전방후원형분의 연구 현황
3. 전방후원형분의 축조 배경
4. 전방후원형분의 축조 세력
5. 맺음말
요약
영산강유역에 보이는 전방후원형분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전방후원형분의 축조가 왜에서 활동한 곤지계가 전라도 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하면서 남긴 흔적임을 알 수 있었다. 먼저 전방후원형분으로 볼 수 있는 고분들에 대한 연구 현황을 살펴보았다. 전방후원형분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라는 한정된 시기에, 영산강유역권을 중심으로 한 제한된 지역에 축조되었다. 유적의 계통도 일본, 백제 계통으로 볼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이 나타나며, 피장자의 성격도 동일하였다. 그런데 교류와 이주에 따른 복합적인 상황은 가야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산강유역에 전방후원형분이 나타난 것은 백제의 지배라는 변수를 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영산강유역을 둘러싼 백제의 동향에 주목해야 하며, 이를 추진한 힘의 실체를 밝힐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다음으로 영산강유역권의 동향과 관련하여 대형 옹관고분과 석실분이 등장하는 점을 주목하였다. 기존의 옹관묘가 대형화되는 시기는 백제의 진출과 관련이 있다. 이 점에 주목하여 근초고왕 때 이 지역에 복속되었으며, 그 지배 형태는 간접통치방식으로 보았다. 웅진 천도 이후 백제는 왕․후를 파견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였다. 이 무렵 횡혈식 석실분이 등장하며, 전방후원형분이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로 이해하였다. 왜와의 관련성은 야마토 왕조가 교류의 주체가 되지 못했으며, 다양한 왜계 유물이 출토되는 것은 이 때문으로 보았다. 이 무렵 영산강유역에 백제계 유물이 최고의 위신재로 등장하고, 일본 열도에도 백제계 유물이 대거 등장하는 것은 백제가 영산강유역을 직접 장악한 결과에 따른 교역로의 확보이며, 영산강유역의 변화를 추진하는 힘의 실체가 백제였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끝으로 백제가 영산강유역을 장악한 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곤지는 좌현왕의 직책을 가지고 처음에는 영산강유역에서 활동하다가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 그 목적은 유사시에 백제의 중앙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곤지의 귀국 이후 동성왕과 무령왕 등 곤지의 아들이 잇달아 백제의 왕이 되자 반대로 왜에 있던 곤지계가 대거 귀국하였다. 곤지계에는 한반도의 도왜인뿐만 아니라 곤지와 관계를 맺은 왜인까지 포함된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국내에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동성왕의 핵심 세력이 되었지만 견제와 활용이라는 차원에서 영산강유역에 왕․후로 파견되어 토착세력가들을 제어하였다. 무령왕 때에 이르러서는 이 지역에 대한 통치가 강화되고, 족적 기반을 해체하는 담로제가 운영되면서 왕․후의 파견은 없어지게 된다. 이 시기가 바로 전방후원분을 축조한 시기와 겹친다. 따라서 전방후원형분의 축조는 곤지계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