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Ⅱ. 공주 송산리 벽화고분의 조영과 문화 계통
Ⅲ.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의 조영과 문화 계통
Ⅳ. 결론
요약
백제에서는 송산리 6호분과 능산리 1호분 단 2기밖에 확인되지 않는 벽화고분의 성격과 위상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먼저 송산리 6호분에 관한 연구에서는 벽돌 제작과 전축분의 축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벽화의 계통은 어디인지, 피장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등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기존 연구사를 살펴보면서 축조기법에 있어서 공적법에 대한 비판, 고구려 벽화와의 계통성 확인, 피장자가 무녕왕의 형제일 가능성 등을 제기하였다. 능산리 고분군은 고구려가 북위의 능원제를 도입하여 傳동명왕릉과 정릉사의 조합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백제가 남조에서 도입한 능원제를 시행한 곳으로 이해된다. 능산리 1호분(동하총)은 대체로 6세기 말~7세기 초반경의 무덤으로 이해된다. 벽화도 연꽃, 사신도, 구름 등의 문양에서 보이듯 6세기 이후의 고구려의 벽화 전통을 고스란히 수용하고 있으나, 제작기술에서의 수준 차이는 존재하고 있으며, 전반적인 양상으로 보아 왕릉급 고분은 아니다.
백제의 벽화고분은 파격적으로 수용한 외래문화의 영향에서 발생된 것이다. 백제에서는 보편적이지 않았던 고분벽화 문화는 6세기 양나라와의 교류나 고구려와의 교류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6세기 전반과 6세기 말~7세기 전반에 각각 1기씩만 확인된다는 점에서 백제에는 고분벽화의 전통이 보편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능산리 1호분의 벽화도 고구려의 석벽화 전통이 고스란히 도상에 반영되고 있어서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교류의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