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언
II. 마한과 마한의 고고학
III. 마한분묘와 그 묘제의 인식
IV. 마한에서 백제묘제로
V. 결언
요약
본고는 마한의 시·공간적 범위를 설정한 후 구체적 개념을 정의하여 그들의 분묘 정황을 살펴 보았다. 이후 그에 따른 묘제의 특성을 검출하고, 나아가 그것이 백제사회에 이르면서 어떻게 변천되었는가를 살펴보는데 목적을 두었다.
최근 마한에 대한 역사인식이 비교적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시간적으로 기원전후 3세기 어간의 마한은 원초적 자료인『三國志』魏志東夷傳에 근거할 경우 종족·지역·문화의 개념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결론할 수 있다. 나아가 정치적 의미로서는 54개의 소국을 아우르는 총합적 개념이었을 뿐이고, 오히려 후대의 마한을 역사체로서 인식의 진전에 따라 왕국 등으로 인지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마한의 기본개념은 정치체가 아닌 지역·시대·문화 혹은 종족적 개념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고, 구체적 정치체로서의 실상은 馬韓小國혹은 馬韓諸國의 용어가 합당할 것으로 정리하였다.
마한을 시·공간적으로 규정하고 그 범위에서 인지되는 분묘자료는 매우 빈약하다. 다만 최근에 발견된 미룡동 고분군을 비롯하여 화순의 용강리 유적의 분묘, 세종시 나성동 유적 등이 있어 동시기 묘제의 대략적 환경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나아가 기왕에 알려진 광주 신창동 옹관묘의 경우도 마한의 분묘로 봄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들 분묘자료를 토대로 마한분묘의 묘제는 일단 封土·封石墓로 정리된다. 묘제는 목관이나 옹관의 사용이 전제되나 이를 지면상을 대강 정지 하여 안치하고, 다시 흙이나 돌을 대강 덮는 방식으로 복원할 수 있다. 이러한 묘제환경은 동시기 분묘자료의 전반적 유실을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매장시설의 빈약상은 아무래도 마한사회 특유의 상장례와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한의 묘제는 소국의 하나였던 伯濟國이 고대국가 백제로 발돋움하면서 전반적 변화를 가져와 백제묘제로 정립된다. 더불어 백제묘제는 이전의 마한묘제와는 커다란 차이를 드러내는데 다양한 묘제가 지역적으로 고유의 분포권을 가지면서 정립되었음이 그것이다. 물론 백제 초기 도읍의 범위인 한강 중·상류지역에는 마한 고유의 봉토묘나 봉석묘가 일정기간 유지되나, 이외의 대부분의 마한지역은 신유형의 묘제 유입과 함께 상호 관련을 통해 다양한 묘제 변화가 연출된다. 특히 분묘는 대체로 고총고분으로 구축되어 이전의 마한묘제와 대비되는데 그러한 변화상은 3세기 후 반경에 새롭게 유입된 주구토광묘의 영향으로 마한지역에 폭넓게 분포되어 있는 墳丘墓즉 분구 토광묘나 분구옹관묘를 통해 알 수 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