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를 비롯한 문헌자료에서는 일관되게 백제 건국세력의 부여 출원을 闡明하고 있다. 그것도 후대 기록만 아니라 백제 當代의 기록에서 그 같은 사실이 多數 확인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유일하게 백제 건국세력을 고구려 계통으로 기록한 온조 시조전승은 의문을 낳게 한다. 실제 『삼국사기』 온조왕본기를 분석해 본 결과 기실 그 속성은 비류왕본기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더 이상 백제 시조 온조왕은 말할 수 없게 한다. 결국 온조왕 시조전승은 대통합을 필요로 했던 高麗 전반기에 생성된 ‘만들어진 역사’의 결과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백제 건국세력의 고구려 출원설의 근거가 되었던 게 적석총이었다. 그러나 한강유역 소위 무기단식 적석총의 속성은 고구려와는 무관한 葺石封土墳 혹은 葺石墓니 葺石式 積石墓로 일컫게 되었다. 이들 고분에 대한 호칭은 다르지만 그 본질은 동일한 것이다. 물론 전형적인 고구려계의 기단식 적석총은 4세기 후반에 조영되었다. 그러나 이는 주민의 이동과는 무관한 墓制 採用에 불과한 현상이었다.
백제 건국세력이 부여에서 출원했음은 문헌 뿐 아니라 고고학적 물증을 통해서도 입증되었다. 가령 풍납동토성에서 출토된 銀製 裝飾 조각이나 금제 귀고리, 馬頭坑의 존재, 墓制와 더불어 火葬 흔적이나 순장과 같은 埋葬風習은 부여의 노하심 고분의 내용과 부합되었다. 그 밖에도 冠帽와 服裝을 통해서도 백제와 부여와의 관련성을 뒷받침할 수 있었다.
백제 한성기 서울 지역의 석실분 조성은 문헌에서도 편린이 확인되었다. 그 뿐 아니라 漢城과 근접한 서울 서초구 우면산 일대와 하남시 광암동 일대의 고분을 통해서도 가늠할 수 있다. 이러한 정황은 서울 지역의 석실분인 가락동과 방이동 석실분의 일부 성격을 백제와 연관 지을 수 있는 轉機를 마련해 주고도 남았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