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주지역에서 많은 고고자료가 조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설에 따르면 웅진기의 고고자료의 수는 아직 미미하다. 이러한 원인은 『三國史記』에 기록된 한성의 일시적 함락과 웅진천도를 백제 한성양식의 하한으로 설정한 것에서 기인한다. 본고에서 검토한 결과 한성지역에서 최소한 6세기1/4분기까지 백제 한성양식의 기조가 유지되었다. 또한 최근 조사 보고된 공주 수촌리유적Ⅱ지점의 2호 목곽묘를 제외한 나머지 분묘와 연기 송원리유적의 대표적인 분묘인 KM016, KM046 석실묘는 웅진기로 편년되었다. 이 편년에 근거하면 금동제 관모, 식리 등의 위세품은 개로왕대에 시행된 왕·후·태수제의 관작 또는 웅진기에 일반화된 담로제와 관련된 유물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는 한성 중앙에서 지방 지배를 위해 사여된 물품이라는 기존의 설과는 다른 해석이다. 한성지역에서 백제 한성양식이 최소한 6세기1/4분기까지 유지되었고, 왕·왕족의 장례와 국가 의례적 목적으로 조성된 정지산유적이 520년경으로 편년되었다. 몽촌토성과 무령왕릉 호석에서 일본 고분시대의 토기인 TK23형식의 須惠器가, 정지산유적에서 TK47형식의 須惠器가 출토되었다. 이것을 감안하면 須惠器의 연대는 현재 일본에서 통용되는 연대보다는 일본의 고전적 연대와 영남지역의 도질토기와의 교차연대에 의한 연대관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