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지방은 일찍이 중요성이 인정되어 삼한시대 국의 하나로 비정된 지역이며 대모산성은 선사시대 이래 취락 구릉을 둘러싼 소규모 포곡식 산성이 겹쳐진 겹성식 산성으로 우리나라 산성형태 중 이형산성에 속한다. 대모산성의 초축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진천의 핵심유적이며 성내 산포유물의 성격을 보아 이른 시기의 관방이다. 또한 무문토기, 경질무문토기, 청갈색경질토기와 흑색토기 등의 토기편이 출토되었고 주류를 이루는 회청색경질토기에는 승문과 승석문이 시문된 원저호 계통으로 대모산성이 5세기말까지 번성한 것을 추정된다.
대모산성은 판축공법으로 축성되었으며 백제토기의 출토를 통해 대모산성을 중심으로한 진천지역이 늦어도 200년 전후 시점에는 백제의 영역이 되었으며 이후로도 대모산성은 이 지역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진천의 고호인 금물노, 흑양은 진천의 중심지인 대모산성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大는 수식어이며 母, 今勿, 黑 등은 모두 神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소지마립간 6년에 나오는 부모성을 대모산성과 동일한 것이며 9세기 말 이 지방이 호족인 임희에 의해 대개축이 단행되었고 이때의 모습이 오늘날까지 남았다. 당시 축조 인원 약 28,000명에 의해 40여일간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대모산성을 축성한 목적은 고구려가 망이산성을 거점으로 삼고 진천평야지대를 장악하려 할 때, 대모산성의 외곽성인 성본리토성과 함께 축성되었을 것이나 고구려에게 점령된 후 차령산맥을 거점으로 백제와 대치하게 되자 도당산성이 주성 역할을 하게 되고 대모산성은 그 기능을 상실하였을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