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촌토성은 서울특별시 강동구 방이동 관하 이동에 들어있는 오랜 사적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곳이 백제 고도인 하남위례성과 약 20리에 위치하며 백제는 한강을 끼고 남진하여 오는 고구려와 사주 공방전을 벌였던 만큼 강안에 위치한 이곳 몽촌은 군사전략적으로 매우 중요시되었다. 북쪽에 있는 풍납리토성이 강 건너 아차산성과 함께 백제군의 방어군지였던만큼 당시 몽촌토성의 전략적 위치도 미루어 알 수 있다.
한강 남안의 이 지역이 옛날에는 경기도 광주군에 속했으며 큰말, 새터, 잔나무골 등 여러 마을들을 통털어 몽촌으로 불러왔다. 이는 몽촌이라는 동명이 가장 유래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몽촌이라는 명칭은 어디서 온 것일까? 고대 삼한 때옛말인 이 몽촌의 처음 이름은 곰말이었는데 그 음이 변하여 한자의 몽촌으로 옮겨쓰게 되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몽촌토성의 주위는 5리인데 높고 낮은 산록과 구릉의 자연지세를 따라 쌓았던 것으로서 성 안이 곧 몽촌 마을이다. 동쪽의 저지대는 토성을 높이 쌓고 서쪽의 봉우리가 높은 곳은 성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토축의 성루로 둘러싸인 몽촌 마을의 출입구인 성문으로 불리는 곳에서부터 왼쪽으로 등성을 따라 약 1km거리는 거의가 옛날 토축의 성지로 인정할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의 충돌은 낙랑, 대방군이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고구려의 남진에 백제의 방어가 강화되었다. 백제의 방어능력에 못지않게 고구려의 공세는 더욱 극렬하였다. 그중에도 고구려의 광개토왕 6년과 그 뒤를 이은 장수왕 63년의 백제에 대한 대공세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견고한 방어시설을 무색하게 하였다. 고구려의 수륙군이 전격적으로 한강이남으로 진출하여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는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몽촌토성이 있는 일대는 한강 남한에 점하고 그 후면으로는 높고 낮은 구릉과 산록이 둘러있어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이에 옛날부터 많은 고관 명사들이 자주 왕래하며 아름다운 4계절을 시로 읊었다. 그 중에서도 려말선초의 명사 조운흘과 조선초의 문인 서거정의 몽촌생활과 명시는 이곳 몽촌의 역사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몽촌토성과 한강 북안의 아차산성, 풍납리토성 등은 근2천년의 역사를 지닌 백제 초기의 유적으로 모두 원형을 잘 살려 보존해 민족사의 산 증거로 깊이 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재 사적지정이 되어있지 않는 것이 유감이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