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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미술

몽촌토성에 대하여(夢村土城에 對하여)

  • 분류 고고·미술 > 관방
  • 권호수 제39호
  • 저자 김용국
  • 발행일 1981년
  • 게재지 향토서울
  • 발행처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목차

位置와 名稱
規模와 年代
百濟, 高句麗의 攻防戰
趙云仡과 徐居正
保存과 美化를 위하여

요약

몽촌토성은 서울특별시 강동구 방이동 관하 이동에 들어있는 오랜 사적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곳이 백제 고도인 하남위례성과 약 20리에 위치하며 백제는 한강을 끼고 남진하여 오는 고구려와 사주 공방전을 벌였던 만큼 강안에 위치한 이곳 몽촌은 군사전략적으로 매우 중요시되었다. 북쪽에 있는 풍납리토성이 강 건너 아차산성과 함께 백제군의 방어군지였던만큼 당시 몽촌토성의 전략적 위치도 미루어 알 수 있다.
한강 남안의 이 지역이 옛날에는 경기도 광주군에 속했으며 큰말, 새터, 잔나무골 등 여러 마을들을 통털어 몽촌으로 불러왔다. 이는 몽촌이라는 동명이 가장 유래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몽촌이라는 명칭은 어디서 온 것일까? 고대 삼한 때옛말인 이 몽촌의 처음 이름은 곰말이었는데 그 음이 변하여 한자의 몽촌으로 옮겨쓰게 되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몽촌토성의 주위는 5리인데 높고 낮은 산록과 구릉의 자연지세를 따라 쌓았던 것으로서 성 안이 곧 몽촌 마을이다. 동쪽의 저지대는 토성을 높이 쌓고 서쪽의 봉우리가 높은 곳은 성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토축의 성루로 둘러싸인 몽촌 마을의 출입구인 성문으로 불리는 곳에서부터 왼쪽으로 등성을 따라 약 1km거리는 거의가 옛날 토축의 성지로 인정할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의 충돌은 낙랑, 대방군이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고구려의 남진에 백제의 방어가 강화되었다. 백제의 방어능력에 못지않게 고구려의 공세는 더욱 극렬하였다. 그중에도 고구려의 광개토왕 6년과 그 뒤를 이은 장수왕 63년의 백제에 대한 대공세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견고한 방어시설을 무색하게 하였다. 고구려의 수륙군이 전격적으로 한강이남으로 진출하여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는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몽촌토성이 있는 일대는 한강 남한에 점하고 그 후면으로는 높고 낮은 구릉과 산록이 둘러있어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이에 옛날부터 많은 고관 명사들이 자주 왕래하며 아름다운 4계절을 시로 읊었다. 그 중에서도 려말선초의 명사 조운흘과 조선초의 문인 서거정의 몽촌생활과 명시는 이곳 몽촌의 역사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몽촌토성과 한강 북안의 아차산성, 풍납리토성 등은 근2천년의 역사를 지닌 백제 초기의 유적으로 모두 원형을 잘 살려 보존해 민족사의 산 증거로 깊이 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재 사적지정이 되어있지 않는 것이 유감이다. (연구원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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