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에 전하는 백제건국의 시기를 그대로 고고학적 자료로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지만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 전환하는 요인과 고총고분의 출현이 중요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
백제전기 고분인 가락동 3호분, 방이동 4·5분, 석촌동 파괴분 가운데 가락동과 방이동 고분은 4세기 중엽 낙랑지방에 출현한 횡혈식석실분의 계보를 잇는 횡혈식석실봉토분이다. 이후 이러한 고분은 일본의 북큐슈에 출현하는 횡혈식석실고분의 직접적인 원류가 되었다.
백제중기 전축분은 귀족층이 중국 남조의 문화섭취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하며, 고분축조에 사용된 문양전 등은 같은 공방에서 왕릉전용으로 제작·공급되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반 고분에서는 석실봉토분이 유행했다. 궁륭상천정, 합장식천정, 평석천정형식의 횡혈식석실로 구분된다. 이러한 석실고분은 고구려의 석실고분의 영향을 받아 백제 기술을 가미하여 조성된 것이다.
부여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후기 고분은 부여나성내부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조묘지역이 규제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후기 묘제의 특징은 불교식화장묘가 유행했으며, 장골기와 중국 화폐가 출토되는 점도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고분문화에 미친 백제고분의 영향은 우선 5세기 전반대 북부큐슈지방에 출현한 횡혈식석실고분이다. 이후 기내지방을 중심으로 7세기대에 유행한 절석적, 전상석축, 석관식석실도 백제 중후기 묘제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한편 종말기 고분의 계보는 고구려의 토포리 1호분이나 백제후기 왕릉으로 비정되고 있는 능산리고분군, 익산쌍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