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사산성이 위치한 천원군 직산 일원을 본래 위례성이라 하였고 고구려가 점유한 후 사산현이라 하고, 고려초에 와서 오늘의 직산이란 지명으로 정착되었다. 사산이라는 칭은 삼국사기 소나열전에도 전해지며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사천이라 하였다. 또한 한강변 풍납동토성을 일명 사성이라 하였다던가 한강변을 사천지원이라 하였다는 등 ‘사’자에 얽힌 동일한 지명, 하천명, 성명이 전승됨을 알 수 있다. ‘사’명은 수도병작을 위주로 농경사회에 들어간 중국 남방에서 유래되었다는 수신계 수룡과 관계 있으며 농경사회로 발전한 삼국시대 안성천을 고마내 웅천이라 불리어졌다는 것이고 일명 사천이라고 하였다는 한강과 더불어 신성한 하천이란 뜻으로 전해온 것으로 보인다. 결국 熊, 蛇, 龍이라는 민간전승의 토템신앙에 유래가 있다고 생각된다.
백제는 비유왕대에와서 마한과 백제의 경계였던 안성천변의 웅천책을 넘어 직산, 천안 지역까지 진출하여 후일 마한전역을 점유할 수 있는 남진의 발판으로 삼았고 아신왕대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직산 일원에 임시 천도하였다고 보여진다. 직산은 문주왕대까지 백제의 영역이었고 고구려 장수왕대부터 양원왕대까지는 고구려 영토, 신라 진흥왕대부터는 신라영역에 속하였다.
사산성의 발굴조사 결과 다음과 같은 특징을 알 수 있다. 사산성은 중국 용산문화기에 발달하여 은대까지 이어진 정교한 판축기법에 의해 축조되었고 판축은 약 2~3cm가량 된다. 성벽 형태와 직산지방의 역사적배경으로 보아 4세기초 산정식산성에서 5세기초 포곡식산성으로 연결한 고구려계 산성에 바탕을 둔 고로봉식산성이다. 성벽의 내외폭은 평균 720cm 가량되며 석축기단은 2~3단이고 성벽하단 점토층 위에 할석편을 깔고 판축하였다.
동문지성벽의 석축기단와 직교하여 돌출한 장방형의 석축구조가 남북양측에 거의 같은 크기로 병존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계 치 혹은 적대이다. 출토유물은 격자문, 어골문, 선조문 등의 와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백제식와편에서 신라, 고려식에 이르기까지의 편년이 가능하다. 동문지 판축기단 최하부에서 자연퇴화된 곡물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일정한 군사의 상주를 알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