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지역에서 산성으로 전하는 유적은 현재의 지명에 의하면 금성산성, 운주산성, 이성, 읍내리산성, 증토산성, 고려산성, 작성산성, 송성이다. 기록에 의해 금성산성이 금이성임을 알 수 있고 운주산성은 고산성이라 불렸으며 운주산은 오늘날 작성산을 지칭하였음이 밝혀졌다.
전의지역의 8개 산성 중 작성산성, 송성은 성으로 보기 어려움이 있다. 작성산이 기우제단이라는 점과 유구의 규모가 지나치게 작기 때문이다. 오히려 금이성의 기능을 보완하는 망루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아진다.
6개의 산성중 증토산성은 고찰이 어렵고 읍내리산성, 고려산성은 토성이며 금이성, 이성, 운주산성은 석축인데 운주산성은 외성인 석성 내에 추조된 토성이 내성으로 자리한다.
산성의 축조연대는 성마다 차이를 보인다. 대체로 전의지역의 산성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아지나 획일적이지 않다. 성의 축조연대 고찰에 우선적으로 성내에서 수합되는 유물에 근거하였음을 밝혀두며 아울러 성의 형태적 특징도 고려하였다.
먼저 금이성은 고려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추정된다, 성내에서 취합된 토기편이나 기와편에서 고려시대보다 이른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토기편의 외견은 비록 고식의 형태이긴 하나 태토분석과 구연의 처리가 고려적 특성을 보이고 태표면 및 내면의 문양에서 백제나 통일신라시대의 것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금이성에서는 고려시대 이후의 유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금이성의 성곽형태도 순수 석성을 협축으로 꾸미고 문지가 현문식인 점, 축조된 석재에 전혀 가공이 없는 점은 이 산성이 백제시대의 산성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운주산성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추정된다. 성내에서 수습된유 물 중 백제토기편과 기와편이 다수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의 추조가 토석혼축에 편축으로 축성되고 축조에 사용한 석재도 가공의 흔적이 보인다. 더불어 운주성에서 출토된 기와편이 백제말기 형식에 속하는 것으로 미루어 성의 축조는 백제 천두 후 북방 방어를 위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성내에는 조선시대까지 기우제단 및 불사가 조영됨이 밝혀졌다.
기타 전의지역에 분포된 산성 중 이성과 읍내리산성은 백제시대 성으로 판명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