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기 방형토성에 대해 검토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방형토성중 풍납동 토성이나 정북리 토성은 한성백제기의 유적이나, 토성리 토성에서는 아직 뚜렷한 자료들이 밝혀지지 않았다. 이들 방형 토성 이외에도 조사가 폭 넓게 이루어지면 보다 많은 유적들이 확인될 것이다.
둘째, 이들 방형 토성들은 북한지역에 소재했던 중국군현성들로부터 직․간접적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풍납동 토성의 축성은 중국군현이 존재했던 시기로 이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정북리, 토성리 토성의 축성시기는 중국군현이 소멸된 이후이나 이들 유적들로부터의 간접적 영향도 고려될 수 있다.
셋째, 이들 방형 토성의 입지조건은 넓은 평야지대의 강이나 하천가의 완전한 평지에 위치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조건에서 홍수의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성벽의 폭과 높이, 성문의 배치 등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홍수피해 때문에 북한지역에 소재한 중국 군현성들도 지형이 보다 높은 둔덕에 위치를 선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넷째, 이들 방형 토성 중 정북리 토성의 대칭된 四門과 八峰 및 옹성의 구조는 독특하며 아주 정제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방형 토성 연구에 주목을 끈다.
다섯째, 이들 방형 토성은 축조공법에서 성토법과 성토다짐법이 응용되고 있으나, 전형적인 판축법이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단석축 역시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토성의 축조공법은 단순 성토, 성토 다짐, 협판을 사용한 판축 다짐, 기단 석축을 곁들인 판축 다짐 순으로 발달해온 것으로 짐작된다. 북한지역에 소재한 중국 군현성에서도 성토 다짐법이 보고되었지만, 아직까지 협판을 사용한 판축 다짐이 응용되었다는 보고는 없다. 한성백제기의 방형 토성에서도 판축법이 응용되었을까는 몽촌토성의 예로 보아 미심쩍은 점이 없지 않다. 만약 이와같은 추측이 옳다고 한다면 한성백제기의 축조공법은 아직 완숙한 단계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섯째, 이들 방형 토성 중 정북리 토성과 토성리 토성의 기능은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일곱째, 한성백제기 방형 토성을 잇는 공주기의 방형 토성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부여기의 왕궁리성만 알려져 왔으나 아직 축조년대가 확실하지 않다. 이 유적은 한성백제기 방형토성과는 입지조건 및 축조공법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