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진토성은 둘레가 2,400m에 이르는 대규모의 토성임에도 1차 조사만 끝난 상태이다. 따라서 축성 시기나 축성목적을 단정하기에는 이른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사 후 이 토성은 6세기 후반 이전의 백제 토성이라고 보아왔고, 별다른 의심없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오히려 최근에는 한발 더 나아가 이 토성이 대형 옹관묘를 남긴 마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주장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회진토성이 과연 백제시대, 아니 그 이전 시기에 축성된 것인지를 확인해 보았다.
그러나 입지나 성벽의 축조 방법, 출토유물 등을 통해 보았을 때 백제, 혹은 그 이전에 축성된 성이라기 보다는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토성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을 듯하였다. 이외에 토성의 규모나 성문의 구조, 위치 등을 통해서 볼 때도 역시 회진토성은 삼국시대, 혹은 그 이전 시기의 토성이라기 보다는 통일신라시대의 성곽이 갖는 특징을 더 많이 갖추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조사자들은 남문지 바닥면의 하부에서 또 다른 열석이 확인되어 이러한 열석을 남문지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고, 남문지가 초축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개축되면서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지만 열석의 존재만으로 남문지의 개축을 단언할 수 없다. 남문지나 門墩이 주위에서 성문이 초축 당시의 것이 아니고 후대에 개축되면서 새롭게 만들어졌을 것으로 판단되는 유물이나 기타 시설물의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회진토성은 성벽과 성문이 다 같이 통일신라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판단되며, 그 시기는 목천토성이나 신금성이 축성되는 시기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아울러, 그 성격 또한 목천토성이나 신금성이 해당지역의 중심적인 치성의 역할을 하던 곳이라면 회진토성 역시 같은 목적으로 축성된 토성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러한 추론이 큰 무리가 아니라면 회진토성은 고려시대-조선시대에 활발하게 축성되는 읍성의 시원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회진토성의 축성 시기와 축성 목적을 고려할 때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토성이 자리한 회진지역이 통일신라 시기에 견당사들이 당으로 출발하는 중요한 출항지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당시 회진지역의 어디에서 출발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고, 또 회진토성 내에서도 이러한 견당사의 활동과 관련시킬 만한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회진토성의 축성 시기와 영산강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견당사들의 활동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대단히 높다고 판단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