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周留城과 豆良尹城에 대한 史料 檢討
1. 豆陵(良)尹城에 대한 從來의 見解
2. 文獻의 檢討 및 考察
Ⅲ. 白江의 位置에 대한 檢討
1. 白江에 대한 從來의 諸學說
2. 白江에 대한 文獻 檢討
Ⅳ. 周留城 位置 比定에 대한 提言
Ⅴ. 맺음말
요약
백제 주류성에 대해 검토하였다. 周留城은 豆率城, 州柔城이라고도 칭하고 있으며, 周留城 위치해명에 문제점이 드러난 것은 周留城과 豆良(陵)尹城과의 혼동과 백강 및 웅진강의 호칭문제에서 있다고 하겠다. 즉 周留城과 豆良(陵)尹城을 동일지명으로 파악한 것은 사료를 면밀히 검토하지 못한 것으로 재검토가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중국측 사서에서는 강의 호칭을 통칭하여 부르지만, 우리나라의 고대 지리지에서는 나루명칭이 곧 강의 호칭이 되고 있어, 중국에서와 같이 통칭하는 예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국측에서 현재의 금강을 통칭할 때, 백제시대에 있어서 중국에 알려질 수 있는 지명은 웅진과 사비일 것으로 중국측 사서에 熊津江과 泗沘河를를 漢語化한 白江이 수록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로 볼 때 熊津江口 및 白江之口는 다같이 현재 금강하구로 주류성전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백강구전투는 바로 금강하구에서 일어난 사건임이 입증된 것이라 하겠다.
한편, 주류성이 함락된 이후 임존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출동한 신라군이 끝내 실패하고 舌利停(현 서천)으로 돌아와 논공행상함은, 이미 함락시킨 금강하구에 위치한 주류성으로 돌아와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함이며, 이곳에 당군이 留鎭하고 있음을 볼 때 더욱 확실하다. 따라서, 주류성은 금강하구에 위치한 서천군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
특히, 일본수군이 계속 백강구 안으로 진입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벌어진 백강구전은 위기에 처한 주류성을 후원하기 위해서 일본수군이 백강으로 들어서야 하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당 수군을 지휘하고 있었던 유인궤가 일본원군의 진입을 막기 위하여 백강구 어구에 170쌍의 선단을 진열하고 있었던 사실로 알 수 있다. 또한 나당군이 주류성에로의 진격로를 결정하고 그 路上에 위치하고 있는 가림성에 대한 공격여부를 논의하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라 하겠다.
백제부흥군이 주류성을 중심으로 나당군과의 항쟁을 벌이게 된 것은, 661년 위기에 처한 사비성의 유인원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온 유인궤군의 진입을 저지하고 있었던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당의 원군이 금강입구를 통하여 진입하는 것을 저지하고, 일본 및 고구려와 해로를 이용한 통교를 광화하는 한편 금강 이남의 백제유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임존성으로부터 금강입구에 해당하는 서천군 관내에 위치하고 있는 주류성으로 백제부흥군의 본진을 옮기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