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 공산성, 부소산성은 모두 강의 남안에 자리한다. 웅진시기는 응급적 상황에서 移都로서 산성으로의 入保로 해석된다. 신라도 5세기 후반에 명활성으로 왕이 移居한 사실이 있다. 왕성은 낙랑군의 치소․국내성․안학궁성․몽촌토성․공산성․부소산성․월성 등이 대체로 둘레가 2.5㎞ 전후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고구려의 후기 도성으로서의 평양지역에 있는 성곽들에 대하여는 조선시대와 현재의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산성과 평지성이 각기 분리되어 있으면서의 set관계로부터, 이 둘이 결합되어 산성을 동반하는 나성제가 성립된 것으로 이해하는 인식의 변화이다.
고구려에 있어서의 경우에는 가장 특징적인 도성제를 발전시킨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이러한 도성제는 고려의 개경으로 이어지는 계열plan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의 사비도성을 면밀히 연구한다면 고려나 조선왕조의 도성제가 사비도성이 가진 요소나 성격의 영향을 어떻게 받았는가의 문제, 신라의 도성제가 가진 요소의 종합이란 측면에서의 재검토가 가능해질 것이다.
즉, 개경의 경우에는 송악에 처음 勃禦塹城을 쌓고 궁예가 도읍으로 삼았다가, 현종때에 이르러 나성을 축조하였다. 이때 왕궁인 연경궁 만월대를 둘러싼 궁성은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고려와 조선왕조의 도성은 모두가 왕궁의 배후에 있는 산과 거기서 뻗어 내리는 산능선을 이용하여 평지의 민거 지역을 포용하였다.
조선왕조의 경우에도 경복궁을 두른 궁성은 둘레 1,813步이고 높이가 21尺1寸에 4門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외곽에 산봉과 능선을 이용한 경성이 있었다. 산상에서 점차 평지까지를 포용하는 평산성 형식으로 발전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고려가 개경 이외에 서경과 남경을 운영한 전례와 고구려나 백제 및 신라가 京城 외곽에 대규모의 산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방불하게,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는 특히 그 후기에 이르러 도성의 외곽에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이라는 대규모 산성을 두어 臨亂移御의 곳으로 경영하고 행궁을 두었으며, 더욱이 서경과 개경, 화성과 강도까지 운영하는 한양도성의 외곽에 5경제와 유사한 성곽과 행궁을 두는 특수한 역사성을 보여주었다. (필자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