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硏究成果와 傾向
II. 馬韓의 正體性과 墳丘墳
III. 榮山江流域의 高墳丘墳과 前方後圓形墳
IV. 前方後圓形墳 被葬者의 社會
요약
영산강유역에 분포하는 다양한 형태의 고분과 지역적 특색을 보이는 유물들이 고고학 조사에서 새롭게 확인됨으로서, 이 지역에 백제의 완전한 영역적 지배가 언제부터 관철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많은 관심이 집중되어 왔다.
전방후원형분의 피장자와 그 집단에 대한 이해는 특히, 영산강유역 정치집단의 사회수준과 내용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이들 집단과 백제․왜․중국 등과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보다 긴요하다고 할 수 있다.
원삼국시대 후기의 서남해 연안지역의 특징적인 고분인 분구분은 경기도와 주로 충청․전라지역의 서남해 연안지역에서 발견된다. 분구분은 주로 금강유역권과 그 배후의 만경강․동진강유역권, 영산강유역권과 그 주변 연안유역에 분포하고 이와 연계되는 배후 내륙지역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나팔형대옹이 충청․전라지방의 서남해 연안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은 시사하며, 내륙 배후지와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영산강유역 전방후원형분의 조성은 기존 재지의 이형 고분구분과 횡혈식석실분을 기반으로 일본 전방후원분을 참고하여 조성한 고분으로 볼 수 있다. 전방후원형이라는 특징적인 분형은 재지사회 내부구성원의 계층화의 진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분구분을 조성해 오던 나주 재지 세력집단의 계층분화의 최종적 형태로서 전방후원형분의 출현을 상정할 수 있다. 재지 기반층의 주거 양상과 석실 내 출토유물에서 확인되는 부의 개인집중, 개인 독점적 분구조성과 입지는 그러한 정황을 시사한다.
또한 분구분이나 전방후원형분 출토 위세품은 중앙의 지방지배에 대한 지배수단으로서 사여되었다기보다는 금동관․식리․장식대도가 교역집단 최상위층간 위세와 신뢰의 징표로서 지속적인 관계를 기대하는 경우에 의례적 증여물로서 상호 교환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은 사여 또는 지배라는 의미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저분구분 시기로부터 고분구분 시기로의 장기간의 변천과, 횡혈식석실묘까지 포함하고 있는 복암리 3호분의 양상을 참고할 때, 백제는 복암리3-5호석실의 시기인 6세기 중엽부터 영산강유역에 대한 완전한 직접지배를 실현한다. 왜와의 관계는 전방후원형분의 시기인 5세기 후엽~6세기 전반에 가장 활발하게 교류하며, 규두대도가 발견되는 6세기 후반까지도 대왜교역 활동이 재지세력에 의해 계승된다.
더불어 영산강유역 재지유력자가 백제관료화되는 6세기 중엽경에 이르러, 이들 재지유력자가 왜계백제관료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