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토성 내부 아파트 재건축 공사 현장에서 신고된 백제토기편의 존재로 말미암아 풍납토성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 연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5세기 후반까지로 편년되는 유구가 확인되었고 다양한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풍납토성이 당시 최고위층의 신분자가 거주했던 곳임이 명백해졌다. 풍납토성 내부에서 중요한 유구들이 발견됨에 따라 성벽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발굴조사 결과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토성의 상부에 석렬을 쌓아 토루를 보강한 축조 방법이 확인되었고, 성벽 내부에 식물유기체를 섞어 쌓는 방법은 지금까지 확인된 예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었다. 특히 내부에 식물유기체를 깔아 제방 또는 성벽을 축조한 예가 백제 고지인 김제 벽골제, 부여 나성 등에서 확인될 뿐 아니라 일본 큐슈의 수성, 오사카의 협산지 등의 제방유적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당시 토목기술의 전파 과정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로 평가받는다.
한편 토성의 외벽 조사 결과 역시 당시의 정교한 토목기술을 짐작케 한다. 이상 확인된 규모만 보더라도 성벽의 폭이 약 43m, 높이 11m가 넘는 대규모인데, 하부로 내려가면서 그 규모는 더욱 커질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일반적으로 토성 바깥에 해자가 있었을 것을 감안하면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림잡아 연인원 백만명 이상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풍납토성의 축조는 단연코 왕권에 준하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고는 엄두도 못낼 大役事였음이 분명하다.
이상과 같은 조사로 풍납토성의 실체가 어느 정도 규명되었다. 우선 주거지와 유물로부터 대략 기원 전후부터 백제가 고구려에 쫓겨 웅진으로 천도할 무렵인 5세기대에 이르기까지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고,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되고 고대한 토성의 존재로 백제의 왕이 거주하였던 왕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입지상으로도 이웃나라 도성인 고구려의 국내성과 평양성, 낙랑토성, 신라 월성 등과 유사한 양상을 띤다. 결론적으로 풍납토성의 축조연대와 당시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풍납토성이야말로 백제의 첫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으며, 이는 그동안 3세기 중반 이후에야 한반도에 고대국가가 성립되었다는 기존 입장에 일대 전기를 마련할 획기적 자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