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은 다른 유적과 달리 당시의 정치ㆍ사회ㆍ문화ㆍ경제 등 諸分野의 종합적인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유적이다. 그러므로 산성에 대한 연구는 다각도의 접근방법에 의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반월산성은 해발 284.5m의 청성산에 축조된 반월형의 테뫼식 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1,080m이다. 포천지역은 물론 인근 지역에 있는 산성 중 가장 큰 규모이다. 반월산성은 6차례의 학술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로 인해 산성 전체의 변화과정 및 분석이 가능해졌다.
이 글에서는 산성의 활용주체를 백제, 고구려, 신라, 통일신라로 구분해 보았다. 또한 각 시대별로 산성을 활용한 지역에 대한 기능과 목적에 대해 규명하였다. 발굴조사에서 밝혀진 내용을 시대별로 나누고, 이에 따른 현황도를 작성하여 입증자료로 활용하여 보았다.
백제는 내성과 외성을 석재를 사용하여 축성하였다. 성벽 기저부에서 출토된 백제토기는 늦어도 4세기 후반 경에 제작된 것이 분명하고, 출토된 층위가 안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성도읍기 백제시대에 축조되었음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고구려는 6세기 후반 경에 반월산성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서벽과 남벽에 치성을 개축하여 남쪽 지역에 대한 방어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은 한강이북으로 진출하려는 신라를 저지하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신라는 629년 고구려와의 낭비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포천지역 뿐만 아니라 한탄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신라는 접경지역의 산성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그리고 반월산성은 주변 산성의 통제와 보급을 지원하는 포천지역의 중심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통일신라는 나ㆍ당전쟁후 북방 경영을 추진하면서 발해와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반월산성은 대립이 해소되는 8세기 중반 이후까지 군사적 기능은 유지되었다. 이후 반월산성은 포전 지역의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