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전략적 요충지 탄현에 대한 연구는 백제 왕도 방비체제 및 당시 국경선을 알 수 있는 중요 자료다. 탄현의 위치를 대전 동쪽 또는 금산방면으로 본다. 탄현의 위치를 둘러싸고 다른 주장이 제기되는 것은 사료의 부족이 1차적 원인이다. 전략적 요충지임에도 불구하고 탄현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객과적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전국에 탄현이라 불리는 지명이 곳곳에 남아 혼란을 부추긴다. 따라서 지명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당시 신라와 백제의 교통로, 신라군 진격로 등을 감안하여 파악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 점에서 사비도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출발한 신라군의 출발지점은 삼년산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남천정까지 올라갔던 신라군이 대백제 공격 전초기지였던 삼년산성을 지나 금돌성까지 후퇴한 다음 다시 북상했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금돌성까지 후퇴한 것은 태종무열왕이고 김유신 비롯 신라군은 삼년산성을 출발하여 탄현을 통과 후 황산벌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신라군과 백제군 사이에 최초의 전투가 벌어진 황산벌은 현재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 일대로 추측된다. 황산벌은 660년 7월 백제와 신라간의 전투가 있었고 훗날 후백제와 고려 사이의 전투가 있었다. 후백제와의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여 후삼국 통일을 완성한 고려 태조는 종전의 황산을 천호산으로 고치고 개태사를 창건하는데 현재도 이곳에 남아있다.
탄현의 위치를 금산으로 보는 견해는 대전지역에 밀집된 백제 성곽을 들어 신라군이 철통같은 백제 방어망을 피해 금산으로 우회하여 황산벌로 나아갔을 것으로 추론한다. 그렇다면 부흥운동기 웅진지동에 백제의 잔적들이 둔취한 사실을 설명하기 곤란해진다. 웅진도독부성에 머물러 당군의 입장에서도 굳이 이 지역까지 백제의 잔적들을 소탕하러 출동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 지역을 장악한 백제부흥군은 신라에서 부성에 전달되는 군량미를 차단시키고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당군은 마침내 이 지역까지 출정하여 진현성을 비롯한 이 지역 성책을 격파함으로써 비로소 군량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다. 이는 금산쪽으로 우회하는 교통로가 없음은 반증하는 대목이다. 신라군의 진격로가 삼년산성-옥천-대전-황산벌이 분명하다면 탄현의 위치는 기존 통설대로 옥천과 대전 사이에 위치해있던 것이 분명하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