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청주지역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
III. 고구려의 남진과 청주지역 진출시기
IV. 맺음말
요약
청주지역은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가 영향력을 행사한 지역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먼저 삼국시대 전기에는 백제가 청주지역을 차지하여 지방통치의 중심지로 활용했고, 신라는 5세기 말 이후에 청주 인근의 문의지역까지 진출했다. 백제와 신라가 청주지역에 진출한 사실은 각종 문헌 기록과 청주와 인근지역에서 조사된 고분과 성곽 등의 유적을 통해 확인된다.최근 청주지역에서 고구려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조사되어 고구려세력도 어느 시기엔가 진출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청주인근에서 조사된 고구려 유적과 유물로는 청원 남성골 산성, 진천 대모산성, 대전 월평동 산성과 같은 관방유적과 그 곳에서 출토된 고구려식 토기와 귀걸이, 진천 회죽리와 청원 상봉리 출토 고구려식 귀걸이가 있다. 그러나 고구려유물의 출토지가 지금의 청주시계와 일정한 거리가 있고, 청원 남성골 산성유적을 제외하면 모두 단편적인 유물만 출토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있다. 이는 고구려가 청주지역에 대한 점령과 같은 직접적이고 장기적인 영향력을 끼칠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청주 인근에서 조사된 고구려유적과 유물에 대한 편년은 고구려세력이 청주지역에 진출한 시기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이다. 최근까지 청주지역 고구려유적과 유물은 475년부터 551년 사이에 고구려가 청주지역을 점령하던 시기의 것으로 보아왔다. 이는 475년에 장수왕이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그 여세를 몰아 금강 상류지역까지 진출했을 것이라 간주하고, 551년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한강유역을 내줄 때까지 이 지역을 지배하였을 것이라는 선입견에 토대를 둔 것이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의 한강유역 진출과 백제가 수도를 공주로 옮긴 이후에 일어난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기사를 살펴보면 백제는 475년 이후에도 한강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이 한강유역에서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475년 이후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경기남부지역을 거쳐 금강 상류지역으로 진출하였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다만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다시 점령한 것은 529년 안장왕대에 백제 성왕이 국운을 기울인 총공세를 펼쳐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오곡전투에서 패한 이후이다. 오곡전투의 패배로 백제는 한강유역을 상실하였고 고구려군은 경기 남부를 거쳐 금강 상류까지 진출하였던 것이다. 즉 고구려군이 청주지역으로 진출한 시기는 529년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청주와 인근 지역의 고구려유적과 유물의 편년도 529년 이후가 될 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고고학적 편년을 수정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앞으로 더 많은 유적과 유물의 조사 결과에 따라 증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