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전남 동부지역 진출과 그 추이
III. 대가야의 축출과 마로산성 축조
IV. 제ㆍ라의 대립과 마로산성의 역할
V. 맺음말
요약
전남 동부지역에는 마로산성 외에도 18곳 이상을 상회하는 백제계 산성이 남아 있다. 마로산성은 사비기에 축조된 대부분의 백제계 성곽과는 달리 웅진기에 축조되었다. 백제는 전남 동부지역에 대한 직접지배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토착수장층을 활용한 간접통치를 꾀하였지만, 마로산성을 비롯한 일부 요충지에는 중앙에서 성주나 지휘관을 파견하였다.
백제는 마로산성을 거점으로 활용하여 남해안을 통해 안라가야가 자리 잡은 함안까지 진출하였다. 마로산성은 백제가 사비천도를 전후하여 가야지역을 영향력 하에 두면서 전략적 중요성이 감소되었다. 그러나 신라가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살해하고 그 여세를 몰아 가야지역을 석권하면서 마로산성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졌다.
백제는 마로산성을 보호하고 보조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광양만의 건너편에 검단산성을 축조하였다. 마로산성과 검단산성은 상호 보완관계를 이루면서 신라의 해상 공격 방어와 海路 감시 역할을 하였다. 그 외에도 백제는 무왕대에 이르러 여수와 순천, 고흥, 보성의 해안 지역에 산성을 축조하여 신라의 해상을 통한 남해안지역 진출에 대비하였다. 또한 신라가 운봉과 남원의 일부를 지역을 장악하자, 그곳에서 육로를 통해 南進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남원-구례-곡성-순천으로 연결되는 통로에 성곽을 축조하여 대비하였다.
양국이 마로산성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의 백제계 성곽들을 둘러싸고 치열한 접전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마로산성은 무왕과 의자왕대에 이르러 신라와 백제가 옛 가야지역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할 때에는 병참기지가 되었다. 마로산성의 병참기지 활용은 백제와 신라가 해상을 활용해 펼친 대립의 일면을 보여주는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