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지방은 웅진 및 사비 천도 이후 도성방어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으며 서해안에서 생산된 魚鹽 등 물자운송의 중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5方城 중 東方城이 입지하고 있음으로 정치 및 군사의 중심에도 서 있었다. 그리하여 육곡리 7호분에서 출토된 은제 화형관식의 주인공은 가까운 거리에 입지하며 5方 중 東方城으로 비정되는 매화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東方領의 관식으로 추정된다고 하겠다. 고분자료를 통해 볼 때 논산지방의 중심지역은 연산지방이 해당함을 알 수 있다. 특히 황산성을 중심으로 고분들이 群集憤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당시 황등야산군의 치소는 황산성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황산벌전투의 주인공은 계백장군과 5천 결사대이다. 史書에서 4차례라는 횟수까지 적시하면서 백제군이 승리하였음을 밝히고 있는 것은 군사의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이끌어 낸 계백장군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한 서술 내용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신라의 대장군인 김유신이나 흠춘 및 품일의 경우 전혀 활약상이 전하지 않고 있다. 반굴과 관창만이 조연급으로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계백장군은 국가에 충성하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부담없이 싸우기 위하여 妻子를 미리 살해한 문제로 후세의 사론에 거론되기도 하지만 결국 계백장군의 처사가 옳았다는 데로 귀결 되고 있다. 오히려 관창을 두 번이나 적진에 들여보낸 품일에 대해서는 잔인한 처사라고 비판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비판은 영조5년 경연에서 『동국통감』에 실린 이 내용을 중심으로 진행하는데 있어서도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탄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동성왕 23년(501) 7월에 炭峴에 목책을 설치하고 신라에 대비케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웅진도성을 방어할 목적이었음이 부각된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탄현은 백제에서 볼 때는 웅진도성과 사비도성을 다 같이 방어할 요해지에 해당하며, 또한 신라군으로서는 웅진과 사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하여야 한다는 충족 조건을 구비하여야 한다. 진산이나 고산에 비정하였을 시 백제의 영역에 깊숙이 들어오게 되어 전술상 신라에서 채용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신라군의 침공로는 보은-옥천-탄현-대전남부-사정동-흑석동-우명곡-벌곡-황산벌로의 노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계백장군의 삼영에 대해서는 황령산성, 산직리산성, 모촌리산성 등 산성에 비정하고 있었으나, 가림성 및 칠중성에서와 같이 그대로 지나치더라도 대군을 상대로 한 대응방법이 마땅치 않을 뿐만 아니라 5천 결사대의 주된 임무가 신라군의 사비도성으로의 공격로를 차단하는 것이므로 이 공격로를 차단할 수 있는 유리한 지형에 군영을 설치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