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이성산성과 杻城山城
III. 이성산성 축성과 삼국의 각축
IV. 신라의 북진로와 550년 道薩城 전투
V. 都西·도안현과 이성산성
VI. 맺음말
요약
증평 이성산성의 축성과 운영, 그리고 폐성 과정을 군현의 치폐와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종래 이성산성은 추성산에 있는 것으로 보았으나, 지리지를 분석한 결과 추성산은 지금의 두타산 자락의 산성을 가리키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이성산성을 추성산으로 보는 것은 실제 지리지의 거리도 맞지 않을뿐더러, 늦어도 지금의 토축 산성을 이성산성으로 인식한 것은 1899년 직전, 그리고 이성산성 북성의 제원을 파악한 것은 그나마 일제강점기였다. 그렇다면 지리지 등에 언급된 증평지역의 두타산, 추성산, 그리고 이성산은 별개의 지명으로 추성산성과 이성산성의 명칭과 위치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이성산성의 축성 시점은 4세기 전반대, 혹은 4세기 후반경으로 나뉘어 있으나 주거지와 성벽의 중북 상태를 고려하여 4세기 후반대로 보았다. 이후 이성산성은 백제의 남방 경영의 거점성으로 기능하다가, 4세기 말 광개토왕의 남정 이후 다시 증축을 통해 강화된 듯하다.
이성산성의 실질적인 폐성은 5세기 중반 삼국의 대치선이 남한강 상류에 형성되면서 비롯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494년 살수지원 전투를 계기로 미호천 일대에 신라가 진출하게 되었고, 이후 신라군은 추성산성을 쌓고 북진로를 개척함으로써 이성산성 남성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6세기 중엽에 이르러 다시 백제와 신라 동맹군과 고구려의 대결이 펼쳐졌다. 그런데 이성산성은 이후 신라의 북진로에서 벗어나면서 산성의 기능은 상실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550년 전투의 도살성은 지금의 조사결과에 따라 두타산성과 이상산성으로 비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 이곳 일대에서 고구려와 관련된 흔적이 찾아지기 전까지 일단 지명비정을 보류하는 것이 나을 듯 싶다. 그것은 도살성의 비정이 6세기 중엽 신라의 청주지역 진출, 7세기 중엽 백제․신라의 대치선을 결정짓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한편 삼국시기부터 연원을 가진 도안현은 고려 초 새로이 생긴 청당현으로 중심을 옮기면서 폐현이 되었다. 이때 한동안 도안현의 진산으로서 배후성이었던 이성산성 북성도 폐성되면서 이성산성의 역할은 완전히 소멸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