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熊津城에 대한 인식
Ⅲ. 泗比城에 대한 인식
Ⅳ. 周留城에 대한 인식
Ⅴ. 백제성곽에 대한 인식 검토
Ⅵ. 맺음말
요약
경부자은(輕部慈恩)만큼 백제 고고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도 드물다. 그는 1927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약 19년 동안 공주와 그 인근지역에 거주하면서 근대적인 방법으로 백제 고고학을 연구한 전문 연구자였다. 그의 연구는 고분, 성곽, 사찰, 그리고 유물에 이르기까지 백제 고고학 전 분야에 걸친 것이었다. 그 중 여기에서는 성곽 분야의 연구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경부자은(輕部慈恩)이 백제의 성곽을 주목한 것은 백제 부흥운동기에 등장하는 전적지(戰迹地)의 올바른 위치 비정을 하는 것이야말로 백제와 왜의 관계를 해명하고, 당시의 역사적 사실(史實)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웅진성(熊津城), 사비성(泗比城), 주류성(周留城)과 같은 백제 성곽에 주목하였다. 백제 성곽에 대해서 이렇다 할 연구가 없었던 시절, 성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고고학적 연구 대상의 하나로 지목한 것은 큰 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공산성의 경우, 그것이 백제 성곽인지조차 명확히 알 수 없었던 시절임에도 왕궁이 그 안에 있었을 가능성을 타진한 것은 그가 남다른 안목의 소유자임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성곽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백제 성곽 자체의 특징이나 변천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사료상에 등장하는 성곽의 위치 비정에 머물렀다는 아쉬움이 있다. 방법 또한 사료상에 등장하는 地名과 지도상(地圖上)의 地名의 유사성을 통해 위치비정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지도상의 지명에 의존하지 않고 현지답사나 다른 유적과의 관계, 교통로, 유적의 특징, 성곽 안에서의 수습 유물 등을 감안한 위치 비정을 시도했다고는 하지만 중심을 이루는 것은 역시 음운학적인 접근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물론 일제강점기 때에는 백제 성곽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전무했던 만큼 이 모든 책임을 輕部慈恩 개인에게 돌릴 수는 없겠지만, 이미 일본내에서는 神籠石式山城에 대한 성격 논쟁이 일고 있었고, 한국 고대산성의 특징을 바탕으로 神籠石의 성격을 해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백제 성곽을 연구하면서도 고고학적인 방법이 결여된 채 위치 비정에 머문 것은 아쉬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