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사지 도용의 여인 쌍계는 이제까지 고구려벽화에서 보인 쌍계와 다소 차이가 있다. 본래 쌍계의 형태는 중국 동남동녀의 양각두형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쌍계를 받치는 관모의 대륜형태는 중국 관모의 형태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대동강 수산리고분의 여인상에서 유사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남자의 추결은 백제에서도 고구려와 동일하게 실존하였고 진시황제의 도용군인의 변발을 겸한 추결과 더불어 한 대의 병사들은 추두결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티벳계 서역과 동호계 선비사회 및 전국시대 이후 중국 포함 한반도에 이른다. 더욱이 일본의 선주토착인사회까지 전파되고 있다.
관모의 원형 중 피모는 고구려나 신라 관에 영향을 주었고 백제의 나주 금동관 내관에 요인을 찾아 볼 수 있다.
나관 및 금동관에 사용한 녹각, 조우 등은 기마민족보다는 시베리아를 무대로 한 북방사회에 널리 믿어진 샤머니즘과 관계가 깊다. 조우관모문화권에 속한 삼한, 삼국시대는 Scythae 문화의 전파통로와 관계 있는 북방사회와 연결되고 그 영향은 호복을 즐겼다는 전국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주, 솟대 등은 시베리아 퉁구스권의 수목숭배사상과 관련되고 신라의 금관 비롯한 각종 관모의 수지형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백제에서는 유물이나 문헌 등에 幘으로 분명히 인정될 것은 없으나 신라의 금동관 내관이 건의 원리에서 나왔고 고구려 백라관의 내관, 한 대의 관책 내관이 幘인 것처럼 정림사지 발견 용관 내관 역시 건의 기본에서 나온 것으로 백제도 고구려와 유사하게 건관을 널리 사용한 것으로 인정된다.
삼국시대 백제의 관모계통은 북방문화에 바탕을 두고 한문화계 요인이 혼합되어 크게 원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은 범위에서 정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