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나 중국고대사서에도 금속제관을 썼다는 기록은 없고 다만 금은가식이라 하여 금속제관식을 하였음을 알 수 있고 고분 벽화에서도 금속제관을 쓴 것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의 초화문금동관, 화염문금동관은 거의 같은 지역과 시기에 제작되었음에도 구조형태가 판이하고 금동용봉문관식구는 머리에 얹을 수 없고 집안고구려석실분 출토 금동관식은 조잡하여 최고 통치자의 관식이라 볼 수 없다.
백제의 나주반남면신촌리제9호분 을관 출토 금동관도 머리에 쓰고 의식을 거행하기는 매우 어렵게 제작되었으며 무령왕릉의 금관식도 왕과 왕비의 관식이 2개씩 출토되었으나 크기나 형태가 같지 않다.
신라의 금동관으로서 호암미술관의 금동관은 녹각형입식은 없고 연속산자형입식 3개만 서 있는 것이다.
가야의 의성탑리고분 제1묘곽 출토의 금동관은 입식의 좌우측을 썰어서 몇 번씩 비틀어 놓았고 대구 비산동 제 7호분 제1석곽에서는 2개의 금동관이 출토되었으나 형태가 다르고 동래 복천동 제1호분금동관은 3단의 연속산자형입식이 5개가 서 있고 동 제11호분에서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특이한 금동관이 출토되어다.
이상과 같이 금관 금동관이 최고통치자가 착용한 관이라면 일정한 제도, 전통성이 있어야함에도 형태, 구조, 크기, 재료가 다를 뿐 아니라 경산 임당동고분의 금동관 주인공의 치아가 5세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고분출토 금관, 금동관, 모, 관식은 반드시 최고통치자 또는 그 주변인의 일상용 의식용관이라고 하기보다는 타계한 사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주술적 목적의 부장품으로 급조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