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序
2. 武寧王의 治積
3. 誌石文 자료에 대한 검토
4. 誌石 性格에 대한 考察
5. 結
요약
무령왕대는 백제 웅진시대 정치사상 가장안정기에 접어든 태평성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성왕이 다진 국기를 더욱 공고히 만드는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내·외치의 성공은 당시 국제사회에서 강국으로 인정받는데 성공했다. 무령왕대 정치적 안정과 문화 만개는 성왕대에 계승되어 무령왕대처럼 일본에 문화를 전수시켜 비조문화 이룩에 이바지하였고 그 여세는 위덕왕, 무왕으로 계승되어 백제문화의 전성기를 이룩하는데 무령왕의 치적이 발판이 되었다.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을 통해 지석을 만든 순서는 왕의 지석을 만든 다음 그 이면에 왕묘의 위치를 표시하는 위치도를 만들고 능묘 작성에 필요한 토지를 토지신에게서 매입한 매지권을 작성했으며 끝으로 왕비의 지석문을 작성했다고 판단된다. 문헌에서만 3년복상을 했다는 자료가 왕과 왕비를 위해 27개월간 복상 하였다는 사실과 일치하는데 감탄을 금할 수 없고 이는 후한 정현의 예설을 백제가 수용했음을 입증한 것이다. 왕과 왕비에 대한 기록은 지석으로서의 격에 완벽하게 맞지 않지만 간략하나마 그 격을 갖춤을 알 수 있고 간지 가운데 戊己의 위치 배정, 중앙의 구멍, 왕과 왕비쪽의 공백들은 백제 역학사상의 심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라고 판단되며 중앙의 구멍은 능묘의 위치를 표시하고 서울인 웅진에서 중방을 표시한 위치도로 파악된다. 매지문에 나오는 토주, 토백, 토부모 등의 사상은 유교의 천지부모와 중앙숭토사상이 민간신앙화한 것을 후한대 도교에서 수용하여 백제가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왕과 왕비의 지석에 담긴 것은 유교의 효사상과 역학사상 등이 주류이며 유교전통사상이 변형된 민간신앙도 수용됨을 엿볼 수 있다. 무령왕이 그의 부친 동성왕을 위해 백가를 처단한 일, 성왕이 그의 부친 무령왕을 위해 3년복상에 훌륭한 능묘를 조성한 마음은 의자왕대까지 계승되어 의자왕이 해동증자였다는 평을 듣게까지 되었다고 보여진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