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한대부터 묘전에 석수를 배치하는 풍습 가운데 공상적인 신수들이 등장하였으나 이는 무령왕릉 석수와 직접적 관련성은 없다. 중국의 진묘수는 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진묘수의 유형 변천을 요약하기 어렵지만 본고에서 밝힐 수 있던 것은 한진대에는 사각정립형의 진묘수가 주류를 이루며 그후 북위시대부터는 준좌형이 대신하며 한쪽으로는 인면과 수면의 준좌형을 한쌍으로 하는 새로운 형식이 대두되었다.
진묘수의 신수화를 위한 표현수단으로 필수적인 요소를 이룬 것이 유각 및 유익형의 조형이다. 이에 대해 북위시대 이후로는 인면수신의 형태가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한다.
무령왕릉 석수는 연도 중앙에서 입구를 향하여 무덤을 수호하는 형세를 이루며 한편 그 사상을 조성한 모습은 능히 요괴를 물릴칠 신수로서의 위용을 갖추었다. 이를 중국고고학계의 용어례에 따라 진묘수라고 부르는데 다른 이론이 없다고 생각된다.
무령왕릉 석수는 머리에 철제 일각이 꽂혀 있었고 또 어깨 양편에다가 형태가 뚜렷한 익형제식을 조각하였다. 이는 중국 진묘수의 조형에서 볼 수 있는 기본적 관념을 그대로 도입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양익에 대한 조각적 표현은 중국 육조시대의 진묘수에서 볼 수 있는 장모익식과 공통된 수법을 나타내며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보더라도 무령왕릉석수의 미술적 원류가 중국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전체적인 모습을 고려할 때, 이 석수는 중국 북위시대 이전에 주류를 이룬 고식 진묘수의 한 계통에서 파생된 제작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무령왕릉 석수의 제작이 중국에서의 진묘수에 대한 묘장신앙과 그 조형적 양식을 채용하므로서 출현하였다 할지라도 그 조각적 요소는 명백히 백제미술의 소산이다. 석제소산에 의존하였다는 점에서도 백제적독자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두상의 독각을 별도로 철판으로 만들어 수착시킨 점도 중국에서 볼 수 없는 예이다.
백제의 외래문화 섭취에 있어서 다른 2국에 비교하여 보다 적극성을 띤 것은 사실이지만 그 수용의 태도가 백제적인 주체성에 입각한 문화적 동화였다는 것을 우리는 석수에 대한 검토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