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寧王陵 玄室 內部에서는 土器類가 한점도 출토되지 않았고 銀과 銅으로 만든 容器類와 中國製 磁器類만 출토되었다. 이중 中國製 磁器類는 石村洞, 原州 法泉里, 天安 花城里, 益山 笠店里 등지에서 종종 발견되고 있으나 金屬製 容器類의 경우 무령왕릉 이외의 百濟墳墓에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新羅․加耶에서도 금속제 용기류는 수량이 많지 않으며 대형분에서만 부장되고 있어 그 성격의 특수성을 짐작할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제 용기류는 鉢 1점, 皿形容器 3점, 盌 3점, 蓋 5점으로 그 수량이 비교적 많고 종류도 다양한 편이다. 武寧王陵은 525年(523 王崩, 526年 王妃壽終, 529年 追加葬)이라는 절대연대를 가지고 있어 삼국 및 일본 고분편년의 주요 기준이 되고 있다. 이번에 보고하는 동제 용기류 중 발은 같은 유형의 유물이 출토된 대가야분묘의 편년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무령왕릉 출토 동발과 동완A는 왕비의 머리쪽에서 출토되었는데, 王妃의 歿年이 526년이고 埋葬年이 529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본 유물은 6세기 전반의 연대를 가진다. 옥전 M3호분과 지산동 44호분은 동일한 토기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양분의 연대에 대한 기존의 견해는 5세기말설과 6세기 전반설이 있다. 전자의 주요 근거는 출토 마구류의 연대관과 A.D 479년 『南齊書』의 對中遣使記錄이고, 후자의 근거는 무령왕릉의 연대관이다. 이 양자 중 보다 확실한 연대적 근거는 후자가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일본고분 출토 유물의 경우 상대연대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으나 절대연대가 고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측 연대관과의 교차연대 설정보다는 절대연대를 가지는 무령왕릉 출토품과의 대비가 보다 안정된 연대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옥전 M3호분의 劍菱形杏葉에 시문된 龜甲文과 龍鳳文環頭大刀 역시 무령왕릉 출토품과 비교가 가능하므로 大加耶圈의 兩墳을 武寧王陵과 平行期의 墳墓로 생각하고 싶다. 한편 무령왕릉 출토 B․C완은 外反되는 口錄과 동체부의 突帶, 그리고 낮은 굽을 붙이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A완과는 판이함을 보여주고 있다. 本例와 비교할 수 있는 유물은 백제와 대가야권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新羅地域 출토품중 유사한 例가 보이고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