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2월 22일 부여 능산리 고분군(사적 14호)와 나성(사적 58호)사이의 공방터라고 짐작되는 건물지에서 백제시대의 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출토되어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금동용봉봉래산향로에서 재미있는 것은, 몸체 아랫부분에 표현된 물고기-용-인간(왕세자)의 모습은 왕가의 전통이나 태자에 이어지는 왕권의 계승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진다는 데에서 새로운 가설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이 향로는 왕실의 왕권계승과 왕실전통의 표현, 다시 말해 용으로 상징된 백제왕조의 “탄생설화”를 기록해 둔 것이 되겠다. 그래서 이것은 비록 글로 씌여진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의 건국자인 동명왕(東明王)에 관한 서사시인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이나 고려 태조 왕권의 서사시인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 그리고 조선건국신화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해당한다 하겠다. 백제의 건국자인 溫祚는 천손인 해모수나 용왕의 딸인 유화(하백녀)같은 신화적 주인공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몽-서소노-우태라는 복잡하고도 현실적인 관계에서 출발하면서, 유리왕을 피해 남천해 개국을 하게 된다. 그래서 백제는 부여나 고구려의 왕실에 대한 열등감의 극복과 아울러 백제왕통에 대한 정통성을 부여하고 태자책봉으로 이어지는 왕권세습에 어느 왕실보다도 신경을 많이 썼으리라 짐작된다. 백제 13대 근초고왕은 서기 371년 평양을 쳐들어가 고구려 16대 고국원왕을 사살하지만 평양에 머물지 않고 한성으로 되돌아온다. 이는 고구려에 대한 백제왕실의 열등의식을 잘 나타내준다. 이에 따라서 신화보다는 사실에 바탕을 둔 용으로 상징되는 왕권을 잇는 탄생설화가 만들어지게 되고 그것이 이 향로에 구현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래서 여기에 표현된 탄생설화도 그 누구를 구체적으로 지목한 것이 아니며 왕통을 잇는 전통적인 백제왕실의 상징물이며, 그 이후 이 향로는 왕실의 신물이 된 것이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