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초기의 선정인 여래좌상 가운데 擧身光型을 대표하는 동경예술대학 금동불과 頭光型 선정인좌상의 공통적인 특징을 뚝섬 출토 금동불과 구체적으로 비교 분석하였다.
5세기초에 이르러 정형화되는 중국의 선정인 금동불들은 불신의 높이가 7.4cm에서 9.1cm의 범위이고, 中空式 주물이며, 얼굴에 비해 肉髻가 높고 크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반면 뚝섬 금동불은 일반적인 크기의 1/2 정도이고 通鑄式 주물이며 육계도 작다는 점에서 중국과는 구별된다. 표현 형식면에서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타원형의 얼굴 모습, 경사가 심한 어깨, 좌우의 기울기가 서로 다른 어깨선, 바깥으로 곡면을 이루는 상체의 윤곽, 폭이 넓고 수가 줄어든 정면의 옷주름, 좌우 아래로 드리운 옷자락의 불합리한 표현, 겨우 흔적만 남기고 있는 왼쪽 어깨 뒤로 넘긴 옷자락 표현, 낮고 넓은 대좌의 빈약한 하체 표현 등이 중국의 선정인 금동불과는 다르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뚝섬 금동불이 중국에서 조성된 것이라면 불상 전파를 위해서 당시의 정형을 의도적으로 변형시켜 통수식으로 주물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불상의 크기와 주조기법, 세부의 표현 방식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차이점은 뚝섬 금동불이 국내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생각한다. 뚝섬 금동불은 5세기초에 정형화된 중국의 선정인 금동불을 모방하여 국내에서 제작한 것으로, 정형화된 중국의 선정인 금동불이 廢佛이 단행되는 446년 이후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조성 시기는 400년에서 446년 사이의 어느 시기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그 제작지는 어디일까? 5세기 중엽 신라에서는 아직 뚜렷한 불교 수용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 범위를 고구려와 백제로 좁힐 수 있다. 당시 뚝섬 지역이 백제의 고성 지역이었고 또 같은 형식의 선정인 여래좌상이 부여 신리와 군수리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백제불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고구려불이면서도 신라 지역인 경남 의령에서 발견된 연가명 금동불의 예에서 보듯이 소금동불은 이동이 쉽기 때문에 출토지에 근거한 추정에는 문제점이 없지 않다. 또 부여에서 나온 불상 2점도 이미 백제화가 진행된 단계의 것이어서 시간적으로 거리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 미루어 이 뚝섬불은 백제보다는 고구려불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당시 문화적으로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중국 하북지방을 중심으로 이 형식의 여래좌상이 유행했고, 장천1호분의 전실 후벽에 동일한 형식의 선정인 여래좌상이 그려진 점, 그리고 평남 평원군 원오리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선정인 泥造佛坐像등 당시 선정인좌상 형식이 고구려를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던 사실에서도 뒷받침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