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언
II. 백제와당의 중국 남조계 요소
III. 벡제와당의 중국 북조계 요소
1. 용정리사지 출토 판단첨형 연화문 와당
2. 북조 석굴사원내 판단첨형 연화문
IV. 북조계 백제와당의 문양변천
V. 결언
요약
웅진천도 후 백제 와당은 중국의 남북조 요소의 영향으로 서로 판이한 문양을 보유하게 되었다. 즉, 무령왕대 남조 梁과의 관계 속에서 전축분이 등장하였고 여기에 사용된 연화문전을 모델로 원형돌기식의 와당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와당은 판단의 중앙부에 소주문이 맺어져 높게 솟아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원형돌기식의 와당의 시초는 공주 艇止山遺蹟 출토 단판8엽언화문와당으로 판단되며, 이후 公山城 推定王宮址, 공산성 1차 池唐, 挽阿樓址, 大通寺址 등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부여지역에서는 龍井里寺址, 舊衙里 傳天王寺址, 舊衙里百濟遺蹟, 陵山里寺址, 定林寺址, 佳塔里寺址, 東南里遺蹟, 窺岩李遺蹟, 扶蘇山 등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이처럼 남조 梁墓의 전축분에서 비롯된 연화문전은 무령왕릉에 그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는 그 이후 백제, 신라, 일본 등지에서 원형돌기식 와당(일본에서는 “星組”)으로 변화․발전하게 되었다. 반면, 북조 요소를 보이는 백제 와당은 그 출토유적이 매우 적다. 북조의 연화문은 판단 첨형으로 세장하지 않고 보상화문에 가까운 것이 특징이다. 이는 남조 요소를 보이는 원형돌기식 와당의 융기된 소주문과는 판이하게 구별되는 것이다. 그리고 화판과 비교해 중방의 크기가 큰 점, 화판사이의 간판이 역삼각형이 아닌 마름모형 이라는 점도 하나의 특징으로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여러 특징들은 당시 유행하였던 웅진도읍기의 판단융기형 혹은 원형돌기식의 와당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양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식의 와당은 곧 百濟化되어 西穴寺址와 같은 과도기적인 문양으로 변모하게 된다. 즉, 정암리와요지에서 비롯된 1+4顆의 연자배치, 세장한 화판, 역삼각형의 간판, 판구와 주연사이의 溝狀圈帶 등 용정리사지 출토 와당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제 북조 요소를 보이는 특징은 瓣端 중심부의 尖形 밖에는 없다. 서혈사지 이후 판단 첨형은 정림사지나 궁남지 등에 서도일부 살필 수 있으나 瓣端을 처리하는 방법이 판이하게 달라 직접적인 연결은 어려울 듯싶다. 이상에서와 같이 웅진 천도 후 백제 와당을 남조계 요소와 북조계 요소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현재 남아 있는 백제 와당은 판단 및 간판의 형태, 화판과 중방의 크기 비교, 판구와 주연사이의 溝狀圈帶(원권대) 유무 등으로 양분할 수 있었다. 이들 외에도 백제 와당에 내재되어 있는 중국의 남북조계 요소는 더 많을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