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와 익산지역에는 백제시대의 기와가 고고학적인 발굴조사에서 타 지역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이 출토되고 있다. 그리고 이 많은 기와 중에는 문자가 새겨진 印刻瓦도 포함된다. 인각와에 표현된 문자는 문헌기록에서 확인된 五部를 비롯하여 干支와 地名 등으로 이루어져, 빈약한 백제사를 재구성함에 있어 매우 유용한 물적자료로 평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각와에 새겨진 문자가 아주 간략하고 불분명하여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는 미진한 상태이다. 이러한 이유로 본고에서는 백제의 고지에서 출토된 인각와를 종합하여 지역 분포 양상을 통해 출현과 변천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각와의 지역적 분포 양상을 분석해 본 결과, 인각와가 백제 웅진․사비기의 고지인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만 출토되고, 특히 부여의 왕궁지로 추정되고 있는 부소산성과 관북리백제유적, 무왕의 익산 경영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에서 대부분 확인되었다. 이러한 지역 분포의 특징은 인각와의 사용 주체가 백제시대 중 웅진․사비기의 중앙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된 집단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편년 분석을 실시한 결과, 인각와의 사용은 2기로 나누어짐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즉, Ⅰ기는 인각와가 성왕의 왕권강화와 사비천도 과정 중 다수의 문화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면서 물질문화인 인각와도 함께 백제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 확인되는 유물이 소수이며, 유적 또한 적은 것으로 보아 Ⅰ기에는 인각와가 극히 소량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Ⅱ기는 무왕과 의자왕대의 강화된 왕권에 의해 이루어진 대규모 건설공사에 따른 기와의 대량생산체제의 돌입 시기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는 대량 필요한 기와를 원활하게 생산하는 과정에서 성왕대에 도입된 기와의 등면에 도장을 찍는 기술이 이 시기에 와서 보편화 된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