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규암면 외리 출토 문양전은 몇몇 이동 경로를 밟아 외리에서 최종적으로 발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왕흥사 조영을 위해 백제 왕실의 지시를 받아 부여 쌍북리 와요지에서 문양전이 제작된다. 그리고 이어서 왕흥사 건축에 이 문양전이 사용된다. 백제 멸망 이후 왕흥사는 폐허가 되는데, 어느 때인가 왕흥사의 문양전은 부여 외리로 옮겨져 다른 건축물에 사용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외리 출토 문양전의 도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가지 구도로 분류할 수 있다. 연화문전, 와운문전, 반룡문전, 봉황문전 등 네 종류는 원형의 구도 안에 표현되었고, 산경문전과 귀형문전 네 종류는 사각형 구도를 취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을 비롯한 고대 동아시아의 우주관과 일치한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天圓地方의 우주관에 따라, 문양전에 하늘을 상징하는 것들에는 둥그런 원을 둘렀고, 지상을 상징하는 것들에는 모두 방형의 구도를 취했다. 외리 출토 문양전 가운데 산경문전은 한국 고대 산수화의 발생문제와 관련해서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다. 산수화의 탄생문제는 결국 산수가 화면 전체에서 주제로 등장하느냐는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외리 출토 산경문전은 후대 산수화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또 산수를 완전히 독립된 주제로 삼고 있다. 따라서 한국 회화사에서 본격적인 산수화의 탄생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인물산경문전에는 각각의 경물 하나하나가 어떠한 마찰이나 부조화 없이 면 전체 공간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배치되었다. 초기 산수화에서 보이는 구도적 불완전성이나 허술함이란 이 산경문전에서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다. 산경문전에서 거둔 이런 성공은 또한 백제의 산수화가 기술이 아닌 진정한 예술의 단계로 성숙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백제 산경문전은 중국 남북조시대에 탄생한 고대 산수화가 백제에 와서 화려한 꽃을 피웠음을 증거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아우르는 고대 동아시아 문화권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살필 때, 중국 남북조시대 문화의 그 찬란한 결실이 백제에 와서 맺은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산수화의 탄생은 인간의식의 확장이자, 순수 예술의 탄생을 의미한다. 백제의 많은 명품들이 단순한 기술이 아닌 심오한 정신을 기반으로 한 예술로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