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사면석불은 중국적인 요소를 수용하면서도 백제적인 독창성이 강조된 상으로 부드러운 조각수법과 세련된 조형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불상의 부드러운 기법이 남조의 불상과 가깝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으나 부드러운 조각수법은 북조나 남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이 불상의 재료인 조각하기 쉬운 무른 납석과 더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예산사면석불은 이후의 불상들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즉 사면석불이라는 형식적 전통은 7세기후반 연기군 출토의 碑像과 관련된다. 또한 여래입상에 나타나는 통견식 착의법이나 Y형으로 여며지는 승각기, 둥글게 U자형을 이루며 흘러내린 옷 주름은 태안이나 서산마애불로 계승되며 동그랗게 솟은 육계와 소발 또한 백제말기의 정읍 보화리 석불입상에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편삼을 걸치는 착의법은 삼국시대의 불상에서는 매우 희귀한 예로서 7세기중엽경으로 추정하는 익산 연동리 석불에 다시 나타나게 되는 점도 주목된다. 이외에도 手印이나 佛頭를 따로 조각하여 끼우는 조각기법의 영향도 후대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경주 굴불사지를 비롯한 통일신라 8-9세기의 石造佛像들 가운데는 佛頭를 따로 만들어 끼우는 예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에서 유입되는 새로운 요소라기보다는 백제의 석불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겠다. 앞으로 예산 사면석불에 대해서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 외에도 다양한 관점에서의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백제불상의 흐름 속에서 어떤 위치에 해당하며 마애불로 이행되는 과정 그리고 수도인 부여에서 멀리 떨어진 예산에 이와 같은 거대한 석불 조성이 왜 필요했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태안과 서산마애삼존불과도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봉안방식의 문제에서 납석제의 거대한 크기는 국립부여박물관소장의 청양출토 대좌와 더불어 백제불상의 크기라든지 모신 전각의 크기와도 연결된다. 또한 사면석불을 어떤 용도와 형태로 봉안하였는가 하는 점도 당시 전각의 구조와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로 생각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체적인 형상을 조형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복원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현재 남아 있는 佛頭의 부분적 결합을 통해 어느 정도 얼굴의 재현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 전체적인 모습의 복원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