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II. 무령왕릉의 구리거울
1. 왕의 의자손수대경과 왕비의 수대경
2. 왕의 방격규구신수문경
3. 구리거울의 기년과 무령왕릉 - 이름, 제작 기간, 제작자
III. 일본의 우전팔번신사 인물화상경
IV. 결론
요약
본 연구의 대상은 무령왕릉 출토 구리거울 3점과 일본의 1점이다. 거울은 왕의 머리 부근에서 宜子孫獸帶鏡이, 발 부근에서 方格規矩神獸文鏡이 나왔고, 왕비의 머리 부근에서 獸帶鏡이 나왔다. 3점 모두 거울 뒷면이 하늘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일본의 거울은 隅田八幡神祠 소장 人物畵像鏡이다. 원래 구리거울은 고고미술품이자 동시에 구리부적(신앙)과 수양 상징물이면서 화장 도구였다. 아직까지 이들 거울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한 편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3점 구리거울은 왕 즉위 무렵에 같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왕 관련 2 점은 반육각하여 한 번 더 담금질했다. 이들 거울은 무령왕 부부의 신앙 대상물로 생전에 존재했던 것들이다. 그런데 이들 거울이 왕릉에 묻힌 것은 2차 殯葬 때였다. 왕의 방격규구신수문경과 의자손수대경은 525년에, 왕비의 수대경은 529년에 묻힌 것이다. 그동안 일본의 인물화상경 연구는 '거울은 정치다'라는 관점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거울은 거울이다'가 이 글의 관점이다. 거울의 명문에서 '早作明竟[鏡]'은 일종의 관용구이다. 명문에서 사용되는 단어나 어절은 거의 관용적인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은 '早' 대신 '旱'으로 보고 분리하여 해설한다. 예를 들면, '呪具(模造太陽)'라는 풀이를 내놓는다. 그리고 구리거울 재현을 위하여 거의 100여회 가까이 실험하는 노력도 기울린다. '宜子孫' 부류의 거울이 왕과 왕비의 머리 부분에서 출토된 것은 왕이 아닌 아버지와 어머니 즉 '자손이 마땅히 잘 되어야 한다'는 부모의 마음인 것이다. 그 대신 방격규구신수문경은 무령왕의 정치철학이면서 백제의 우주관인 것이다. 인물화상경도 사마 즉 무령왕이 동성왕의 시해에 가담한 일에 대하여 속죄의 뜻으로 신사에서 '遷度齋'를 올리며, 장수를 기원한 것이다. 달리 양보한다고 해도 王葬이 그랬던 것처럼 新이 '天命'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하강한 물건 즉 '銅符帛書'이다. 당 현종은 자신의 생일(8월 5일) 선물로 여러 신하들에게 거울을 선사했다. 이런 연유로 중국에서는 8월 5일에 거울을 주는 풍속이 생기게 되었다. 요사이 말로 하면 '거울 날'인 셈이다. 거울은 언뜻 생각하면, 여인의 화장도구로만 생각된다. 그러나 사찰의 十王殿에서는 심판대인 '業鏡臺'이며 전통 사회 양반들이 자기 수양을 나타내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銅鏡' 대신 우리말인 '구리거울'로 '거울은 거울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싶기 때문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무령왕 관련 거울은 왕 부부의 삶과 백제 시대 우주관을 담은 '민속유산'인 것이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