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소조상의 제작시기와 계통 문제를 검토하였다. 먼저 Ⅱ장에서는 정림사지 출토 소조상의 제작시기에 대해 검토하였다. 정림사지 소조상의 제작시기는 삼족토기나 중국 청자편과 같은 공반유물을 통해 볼 때 그 상한이 사비 천도 이전까지 소급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조인물상의 제작기법이나 형태가 북위 후기의 도용과 유사한 점이나 사비 도성의 정비 과정을 감안하면 그 제작시기도 사비 천도 이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양서』등에 기록된 541년 工匠․畵師 파견 기록이 주목된다. 백제 성왕은 이때 사비 천도 사실을 양무제에게 처음 알리고 사비 도성의 정비와 상징물을 건립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문물을 요청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양에서 건너온 공장․화사의 참여로 이루어진 결과물이 정림사지 목탑과 탑내소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한편 541년 백제로 건너온 전문기술자들은 연판의 끝이 뾰족한 정림사지 B형식의 연화문수막새나 황갈유가 발린 소조불두와 같은 소위 백제연유 기술도 함께 전해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Ⅲ장에서는 소조상이 계통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정림사지 소조상의 계통에 대해서는 북조 도용이나 낙양 영녕사 출토 소자상과의 유사성으로 인해 북조 계통으로 파악하였다. 하지만 중국 남북조시대 도용의 경우 소위 한수유역양식과 같이 남북조 문화가 접합되는 현상이 확인된다. 또 사비 천도 전후 북조와의 사신 왕래가 전무했던 것이나 541년의 문헌기록, 봉보주보살상과 같은 남조 특유의 도상이 발견된 점이 주목된다. 따라서 정림사지 소조상의 계통은 북조의 직접적인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북조의 영향을 받아 남조 건강 내부에서 문화접변이 이루어진 것이 재차 백제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527년에 완성된 건강의 동태사 9층 목탑이나 최근 남경 지역에서 출토된 소조상편은 建康에도 탑내소상으로 장엄된 목탑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여 정림사지에서 발견된 봉보주보살상과 같은 남조계통의 불교도상과 능사 등지에서 출토된 소조상들은 현재 공백으로 남아 있는 남조 불교미술과 남북조 문화의 접변을 추론하는 자료가 될 것이다.
끝으로 부여 정림사지의 사명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였다. 정림사지라는 명칭은 고려 시대 명문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사비시기에 중국이나 일본에 동명의 정림사가 공존한 점을 볼 때 창건 당시에도 정림사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