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부여 능산리사지 가람중심부에서 출토된 와당의 형식 분류와 상대편년안, 기와 공급체계를 재정리한 것이다. 567년 이전에 건립되어 660년 무렵에 廢寺한 이 절터에서는 502점의 와당이 출토되었는데, 형식 분류 결과 13종류의 蓮花文瓦當과 2종류의 巴文瓦當, 1종류의 素文瓦當이 확인되었다.
연화문와당은 연판 문양과 중방의 형태, 연자의 수, 와당과 수키와의 접합방식 등에 따라 세분된다. 1형식은 創建期 와당으로 모두 5가지로 세분되며, 567년 이전부터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1형식의 세부 형식들은 태토와 소성도, 연판 문양, 접합방식, 와당과 접합된 수키와의 형식 등에서 차이가 발견되기 때문에 그 내부에 工人差, 工房差, 年代差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형식과 4형식, 9형식도 초기에 제작된 와당들이다. 초기의 와당들은 1형식과는 태토, 소성도, 접합 기법, 연판 문양 등이 다르기 때문에 생산 공방과 공인, 연대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대체로 창왕명 석조사리감이 매립된 567년 이후에 제작되어 공급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형식의 와당들은 6세기 후반부터 멸망기까지 시기적으로 중첩되면서 계속해서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이 와당들은 출토 수량이 적고, 일부 와당의 경우 특정 건물에만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경향이 있으며, 연대적으로 초기 와당들 보다 한두 단계 늦게 출현하기 때문에 補修用 와당으로 생각된다.
보수용 와당 중 2형식과 5형식, 8형식 와당은 가람중심부가 1차적으로 완비된 이후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에 제작 사용되고, 7형식과 11형식은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6형식을 비롯한 10형식, 12형식, 13형식 및 파문 1식은 7세기 전반에서 중엽에 제작되고, 파문 2식과 소문 와당은 7세기 중엽 이후에 제작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5형식은 금당지, 6형식은 목탑지, 7형식은 강당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기 때문에 이 건물들의 보수를 위해 특별히 제작․공급된 와당으로 생각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