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변에 위치한 입점리고분군에서 조사된 석실묘인 86-1호분에서는 백제계 金銅製 冠帽와 飾履·垂下飾·金製 耳飾 등과 함께, 마구류, 토기 5점 등이 출토됨으로써, 한성기 말~웅진기에 걸친 백제 지방세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부각되었다. 여기에서 출토된 마구 또한 백제지역에서 그 예가 드문 장식 마구로서, 재갈의 경우 함 외환이 이중으로 되어 있는 독특한 형식으로 주목되어 왔는데, 최근 보존처리가 완료된 입점리 마구를 관찰한 결과 제작기법과 형태 등에서 새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갈 가운데 타원형의 재갈쇠멈추개는 철제 지판 위에 은판을 놓고 얇은 철판으로 주연부를 돌린 다음 원두정을 사용하여 고정한 형식이다. 재갈은 함의 경우 1조선의 철봉 위에 가는 철선을 돌리는 감기기법에 이중외환으로 되어 있으며, 인수는 1조선에 등자형의 고삐-인수 연결금구가 달려있는 새로운 형식이다. 등자형 고삐-인수 연결금구는 청주 신봉동, 천안 용원리, 해남 월송리 등지에서 확인된 바 있으며, 사슬형도 공주 수촌리에서 출토된 바 있다. 최근에는 선행형식으로 보이는 원방형의 고삐-인수연결금구도 오산 수청동에서 출토된 바 있어, 백제 지역에서 이러한 금구가 처음부터 유행하여 자체 제작·변화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입점리 마구의 제작지는 전체적으로 백제지역으로 보아도 좋으나, 銀裝扁圓魚尾形杏葉 등 영남지역 마구의 요소도 갖고 있는 점으로 볼 때 5세기대에 두 지역 사이의 기술적 교류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입점리석실의 축조연대에 대해 기본적으로 한성기에 조영된 것인가 아니면 웅진기에 해당하는가의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입점리 마구의 제작기술에 대한 검토 결과 遊環의 사용과 같은 입점리 재갈의 특징들이 이미 5세기의 이른 시기부터 나타나고 있는 점과 함께 단면 오각형의 철제 등자가 고식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점 등에서, 그 제작연대가 한성기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공반된 중국 청자 사이호의 교차편년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입점리 출토 청자는 중국에서의 제작·부장연대가 5세기 중엽을 상회하고 있어, 입점리 석실 피장자에게 입수되기까지의 과정을 고려하더라도 최소한 5세기 3/4분기 무렵에는 중국 자기와 마구가 입점리 피장자에게 입수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5세기를 전후한 무렵 한 가닥 철봉의 外環을 구부려 만든 인수와 1조선의 함+유환의 사용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전형적인 백제마구가 완성된 후, 장식마구와 이중 외환 등의 특징이 한성기에 이미 출현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입점리 석실묘 피장자의 성격은 한성기라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