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기는 부여 왕흥사 목탑 터에서 2007년 10월에 공개된 577년의 명문이 기록된 청동합에 이어 발견된 제작 연대가 확실한 사리기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를 통해 그간 자료 부족으로 연구가 어려웠던 7세기 금속 공예의 전개 과정을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미륵사지 사리기중 제작 기법이나 문양 면에서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금동사리외호의 제작 기법과 문양을 분석하였다. 먼저 기형 면에서 고찰된 것으로 보면, 목이 길고 몸체가 卵形에 가까워서 북위에서 수대까지 전개되었던 北朝系의 有蓋長頸壺 계열로 분류할 수 있다.
미륵사지 금동호 몸체에는 목 둘레의 도드라진 융기선을 비롯하여 2줄의 음각선이 일정하게 시문되어 있다. 이는 녹로를 이용하여 표면을 절삭하는 제작 과정에서 시문된 흔적으로 파악된다. 중국의 경우는 병이나 호를 일체형으로 제작하는데 반해 백제에서는 몸체 상부와 목 부분을 따로 성형한 다음 이를 제물땜으로 합체시킨 것으로 분석되었다.
몸체 표면에 장식문양을 새기는 彫金기법인 선조기법과 어자문 기법을 고찰한 결과 먼저 선조기법은 현대의 조각장들이 사용하는 조이질로 작업한 것과 같이 깊고 유려하게 음각된 모습이 확인되었다. 또한 어자문의 경우, 크기가 다른 어자문을 다채롭게 시문한 점과 간격이 밀집되지 않은 점에서 이란(Iran)계의 어자문을 연상시킨다. 미륵사지 금동호의 어자문 기법은 통일신라 불국사 석가탑 사리기의 어자문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미륵사지 금동호에 시문된 식물문, 연주문, 보주문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무한한 생명을 상징하는 권초문의 경우 6-7세기의 고식의 권초문이 계승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연주문은 백제 부여 외리 문양전 등에서 알 수 있듯이 6세기 후반에는 북제의 연주문이 수용되어 전개된 것이 이어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연주문은 천상의 빛의 의미로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금동호의 어깨부분에 시문된 보주문이 불국토의 광명의 빛을 상징하는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