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사라장엄구의 출토 위치
3. 사리용기의 조합과 제작기법
4. 사리공양품의 구성
5. 맺음말
요약
부여 왕흥사지 목탑과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을 비교하였다. 먼저 사리장엄구의 출토위치를 비교해본 바 왕흥사지에서는 사리용기와 사리공양품이 분리되어 있음에 비하여 미륵사지에서는 이 양자가 사리공에 함께 봉납되었음에 주목하였고, 이어 왕흥사지의 경우 사리봉안기가 사리 용기인 청동함의 표면에 새겨져 있음에 비하여 미륵사지의 경우 별도의 금관으로 분리되었고 보다 많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볼 수 있었다.
둘째는 사리용기가 어떤 조합을 이루었고, 금속기의 경우 어떠한 기법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해 검토하였다. 두 유적 출토 사리용기는 모두 세 겹으로 중첩되어 있었는데 왕흥사지의 경우 금>은>동, 미륵사지의 경우 유리>금>금동 등 위치에 따른 재질차를 보인다. 이 가운데 시기적으로 오래된 왕흥사지 사리용기의 구성이 중국 남조의 그것에 보다 가까울 것으로 추정하여 보았다. 또한 사리용기의 제작기법을 사리용기의 중첩방법과 관련지어 살펴보았다. 왕흥사지의 경우 구연을 통하여 각 사리용기를 중첩하였기 때문에 사리용기 사이의 크기나 형태에서 차이가 컸겠지만 미륵사지의 경우 금속제 용기의 동체부분을 2분하여 상부 전체를 뚜껑처럼 덮을 수 있도록 고안하였으므로 왕흥사지의 경우처럼 각 용기 사이의 크기 및 형태 차이가 현저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셋째는 사리공양품의 구성 양상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두 유적 모두 기본적으로는 사비시기 고분 출토품에 비견되는 것이지만 장신구나 생활용품 뿐만 아니라 地金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금이나 은정을 포함한 점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양자 가운데는 왕흥사지 출토품이 수량이나 종류가 보다 많으며 중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이 포함되어 있다. 장신구 가운데는 수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도 있고 전체 물품 가운데 일부분만 떼어 넣은 예도 있는데 이는 봉납공간의 부족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보았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