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왕궁리 오층석탑 해체수리 당시의 유구해석은 후대에 중수되었을 가능성이 전혀 고려되지 못했다. 그 결과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적 특징이 명확한 금동여래입상은 왕궁리 오층석탑과 사리장엄구의 상한연대를 규정짓는 절대적인 자료로 채택되어 왔다. 그러나 기단에서 발견된 금동여래입상은 통일신라 말에 이르러 석탑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추가로 납입된 유물이기 때문에 왕궁리 오층석탑과 사리장엄구의 제작시기와는 관련이 없는 유물이다.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의 편년에 대해서는 이미 금제사리내합에 새겨진 문양의 비교분석을 통해 백제의 작품으로 거론된 바 있다. 그리고 이후 축적된 사비시대 백제 유적의 조사 성과는 이를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모아지고 있으며, 특히 인접한 미륵사지 서원 석탑에서 확인된 백제 석탑의 사리장엄구와 그 봉안방식은 왕궁리 오층석탑과 사리장엄구가 백제의 작품이라는 결정적인 근거를 제시하였다.
유리사리병을 중앙에 두고 금제용기와 금동용기로 중첩되는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의 재질과 구조는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와 일치한다. 나아가 사리기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과 시문기법은 동일인의 작품으로 거론될 정도로 왕궁리 오층석탑 금제사리내합의 문양과 흡사하다. 이것은 왕궁리 공방유적에서 발견되는 유리구슬과 금제품이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두 석탑의 사리장엄구가 동일한 공방에서 제작된 결과라고 판단된다.
그리고 왕궁리 오층석탑 기단 내부의 심초석과 사천주는 미륵사지 석탑의 내부구조를 축소한 형식으로 파악된다. 아울러 석탑 해체수리 당시 확인된 심초석에서 3층에 이르는 심주의 구조 또한 미륵사지 석탑 탑신부의 내부구조와 일치하는 것으로 백제에서의 석탑 발생 초기단계의 내부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왕궁리 오층석탑의 내부구조는 미륵사지 석탑과 마찬가지로 백제에서의 석탑발생 초기 목조탑파를 석탑으로 번안하는 과정에서 외형뿐만 아니라 내부구조까지 충실하게 반영한 결과이며, 왕궁리 오층석탑이 백제시대에 건립되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근거라 하겠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