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Ⅱ. 한군현과 印綬衣幘
Ⅲ. 한군현의 몰락과 마한 사회
Ⅳ. 고구려와 신라의 의책 사여와 羈縻政策
Ⅴ. 백제의 마한에 대한 金銅冠帽 사여
Ⅵ. 결론
요약
본 논문은 한반도 남부의 마한계 고분에서 발굴된 금동관모를 한군현의 독립적인 재지세력에 대한 인수의책 사여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검토하려는 시도이다.
3세기 낙랑과 대방의 두 군을 통해 한반도에 진출하였던 魏는 韓 사회의 유력자에 대한 통제책으로 邑君․邑長 등을 의미하는 인수와 의책을 사여하여 韓 사회의 臣智 등을 통제하였다. 이는 漢 이래로 지속된 타민족인 外夷에 대한 中華主義적 羈縻政策이었다.
백제는 한군현의 몰락 이후 대방의 후신을 자임하였다. 대방은 한과 왜를 기미지배하는 역할을 수행한 군현이었다. 백제가 이의 후신을 자처한 것은 대방의 한 및 왜 사회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에 사여된 의책으로 여겨지는 것이 바로 백제계 금동제 관모 및 관식, 식리 등이다.
이들 금동관모의 사용 시기는 4세기 중반에서 5세기 후반이다. 하지만 금동 관모는 백제의 직속 지배 영역과 접하는 지역에 위치한 재지세력에 대한 통제의 차원에서만 사용된 듯하다. 금동관모는 백제-마한 영역의 전체가 아닌 두 세력이 접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시기와 위치를 달리하여 발견되기 때문이다.
475년 한성백제의 종언과 함께 금동관모의 사여는 중단되었다. 그리고 6세기 중반 이후 銀製花形冠飾이 이를 대체하여 사용되었다. 이는 해당 지역이 백제의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 안에 포섭되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자주 지역에서는 재지세력의 지속적인 지배의 추이를 가늠할 수 있는 고분들이 존재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