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시기 백제 기와는 한반도의 고구려, 고신라뿐만 아니라 백제의 웅진사비기의 기와와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 시기의 제작기법과 문양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국과의 연계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문양과 제작기법의 측면에서 보면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한, 남북조시대, 한반도의 한의 종속국이었던 낙랑 등과의 교류를 통한 기술적 연계를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평기와와 수막새는 나누어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서로 연관성이 높고 현장에서 서로 한 기와를 제작하는 작업에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한성시기의 기와는 제작 기법에 있어 이러한 연관성이 더욱 짙다고 보여진다.
한성시기 기와는 출토된 유물로 보아 초창기부터 제작기법에서 발달된 충분한 기술력을 충분히 도입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점은 수막새와 평기와 중 어느 한 종류가 먼저 도입되었다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백제의 한성시기 기와는 평기와와 수막새가 거의 동시에 기술자에 의하여 직접 전수되었거나, 교류를 통하여 기술력을 전수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이 시기 기와의 도입은 풍납토성의 안정된 유적과 함께 출토된 유물을 고려하면, 3세기 후반경에는 이미 들여왔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문양의 도안이나 적용력으로 보면, 수막새의 경우 중국의 전국시대, 한, 남북조시대의 와당, 전문토기 및 자기, 한반도의 낙랑계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평기와의 문양은 중국의 그것이 승문이 우세한 점과는 달리 백제의 한성시기의 기와는 격자문이 절대 우세하고, 승문과 선문이 적다는 점에서 백제는 제작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부분을 백제화한 하나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백제 와장들의 현지 상황에 맞게 대응하면서 뿌리가 내리고 전통화하지 않았을까.
제작기법에서도 와범에 의한 내림새의 제작, 가래떡형 소지의 사용, 수막새의 내림새 중 화판부와 주연부를 따로 제작하거나 동시에 제작하는 방법의 중국과 공유 등은 그 도입계통의 연관성을 생각하게 하는 요소라고 볼 수 있겠다.
수막새의 문양에서도 소문의 등장과 다양한 백제화한 전문의 본격적인 도입은, 중국의 수막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백제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성시기의 백제 기와는 중국계통의 기와와 양자간 기술교류 등에 의한 시작에서 백제의 기와를 발전시켜, 실용성과 경제성을 고려한 백제만의 것으로 승화시킨 기와를 생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 맺는말)